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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Oct 25. 2024

팔자 좋은 미숙

5회

미숙은 첫째를 낳기 일주일 전까지 다리를 절며 병원에서 일했다. 출산일이 가까워지자 아이가 내려와 신경을 눌러서 절게 됐지만 특별히 아프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료들은 만삭인 미숙에게 자꾸 앉아서 쉬라고 해서 아이 덕분에 일이 힘들지 않았다. 미숙이 이토록 끝까지 일한 건 남편의 레지던트 월급으로 세 식구가 먹고살 수 있지만 휴가기간에 디즈니월드에도 가고 옐로 스톤에도 가보고 싶어서 그랬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모아 놓아야 마음 편히 여행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숙은 가계부를 쓰지 않았지만 한 가지 원칙은 지켰다. 한 달 기본적인 지출 비용과 외식비 등을 계산하여 월급을 넘지 않는지 확인하고 충동구매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용카드 청구서가 날아오면 청구된 금액을 모두 정산하여 한 번도 이자를 낸 적이 없었다. 


첫 째가 한 살 반 일 때 둘째를 임신했다. 계획된 임신이었다. 어느 날 미숙이 막 돌이 지난 아들이 책을 넘기는 모습을 보며 앞으로 아이가 크면 무엇을 할지 생각해 봤다. “지금은 아이가 온전히 엄마에게 의지하는 시기여서 엄마가 모든 걸 해 줘야 하지만 앞으로 점점 독립적이 될 거다. 17년 후면 대학생이 된다. 그때 나는 뭘 하지?” 미숙은 둘째도 빨리 낳아 막내가 말을 하게 되면 직장에 다시 나가고 기회가 된다면 박사학위까지 받아서 대학에서 가르치고 싶었다. “미국에서 유색인종으로 살아가려면 적어도 의지할 형제는 있어야 해.” 미숙은 어느새 미숙의 부모가 말하는 걸 따라 하고 있었다. 미숙은 앞으로 둘째가 태어나면 첫 일 년은 기저귀와 분유 등 들어갈 경비를 따져봤다. 태식이 모든 수련과정을 마치고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면 현재 연봉의 3배 가까이 받게 되겠지만 아직 4년은 더 배워야 한다. 그래서 미숙은 이웃 유학생 부인이게 큰애를 맡기고 나이트 근무를 했다. 수술실은 원하는 시간에 일을 할 수 없어서 심장내과로 지원했다. 주말에 이틀 밤을 꼴딱 새우며 일하면 주말 수당, 밤 수당 등이 더해져 일반 가호사보다 시간당 거의 두 배의 시급을 받아 한 달에 8일만 일해도 일반 간호사의 한 달 월급과 맞먹었다. 미숙은 둘째를 낳기 3일 전까지 만삭의 몸으로 일했다. 둘째가 태어나자 미숙은 “배속의 아이가 있을 편하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했다. 가끔 보모를 고용하고 싶었지만 미숙이 파트타임으로 일해서 모아 놨던 자금을 뭉텅 때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까웠다. “옛날 사람은 아이를 둘러업고 밭에 나가 일하고 찬물에 빨래하고 그렇게 살았는데, 더운물 펑펑 나오는 따뜻한 집에서 아이 둘 키우는 거… 정신적으로 힘들지만 육체적인 건 견딜 만하잖아. 동네 미국 부인 한국 부인 만나서 떠들면 스트레스 해소하면 되지. 그리고 요 예쁜 내 새끼들 금방 커서 내 곁을 떠날 테니 엄마 바라기만 할 때 많이 즐기자.” 이런 생각을 하며 인건비를 아꼈다. 


미숙이 육아를 홀로 담당한 건 태식이 48시간 당직을 서고 돌아와 하루 쉬고 다시 48시간 당직을 서는 혹독한 수련의 스케줄 때문이었다. 미숙도 병원에서 일해봐서 태식이 얼마나 힘든 지 알았다. 첫 아이를 낳고 병원을 그만둔 미숙은 태식이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도록 기꺼이 육아를 전담했다. 그러나 태식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아기를 돌보며 저녁에 아기가 자주 깨면 미숙보다 태식이 먼저 일어났다. 이유식과 분유를 잘 먹던 첫째 아이가 일반 우유를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우유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다. 다행히 치즈는 먹어서 치즈와 칼슘이 들어간 100% 오렌지 주스를 우유 대신 줬다.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에게 하루 세끼 밥을 먹이고 나면 숙제가 끝난 것 같았다. 주중 미숙의 식사는 늘 같은 메뉴였다. 소고기 된장찌개. 아이 이유식을 만들 때 넣었던 소고기 양파 호박 감자 셀러리 중 셀러리만 빼고 나머지 재료에 된장을 넣어 끓이면 됐다. 한국 마트에서 사 온 김치 한 통을 사면 한 달은 먹을 수 있었다. 미숙보다 태식이 김치를 더 좋아했지만 태식은 병원에서 일할 때 김치 냄새가 난다고 주중에는 김치를 먹지 않았다. 인도 의사에게서 카레 냄새가 난다고 말한 태식은 혹시 다른 의료진에게 김치 냄새를 풍길까 염려되어 토요일에 한 번만 김치를 먹었다. 그래서 미숙도 한국 음식을 만들 때 생마늘 대신 마늘 가루를 썼다. 


다행히 미숙은 된장찌개를 좋아해서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그러나 새콤달콤한 물김치나 깻잎 취나물 도라지 머위대 나물 등 온갖 나물이 먹고 싶으면 할머니 댁에서 일을 도와주던 순이 아줌마가 생각났다. “순이 아줌마가 있었으면 멸치도 꽈리고추 넣어 볶아주고 갈치에 시래기를 넣고 졸여줬을 텐데… 그리고 우리 아이 입맛에 맞는 음식도 만들어줬을 거야… 아, 요리하는 것 좀 배울 걸…” 미숙의 부모는 외손주들이 태어날 때마다 보러 왔다. 그러나 미숙이 태식의 근무지를 따라 버펄로로 이사 가서 손주들을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규모를 줄이기는 했어도 계속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어서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도와줄 수 없었다. 미숙의 남동생은 부모의 기대대로 의대에 합격했다. 그러나 뉴욕시에 있는 학교여서 장학금을 받기는 했지만 부모가 보태 줘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다행히 미숙이 한국으로 이사오기 전 동생은 부모가 사는 시카고에서 레지던트를 시작해서 비록 부모가 거주하는 지역과 한 시간 이상 떨어진 병원이라 집에서 출퇴근을 할 수 없었지만 주말에는 한 번씩 들릴 수 있어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미숙의 마음이 덜 무거웠다. 미숙이 미국을 떠날 때 부모님도 벌써 60이 넘었었다. 그래도 미숙이 친정을 생각하면 뿌듯했다. 미숙의 부모는 미숙의 큰아버지처럼 한인사회에서 모범적인 이민자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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