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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 Mar 17. 2024

착함!

"찬희가 참 착하다!"(찬희는 미국 뉴저지에 사는 나의 둘째 딸아이의 첫째 아들 이름이다)

" 엄마! 찬희보고 착하다는 말 하지 마.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찬희보고 착하다고 하니까 쟤가 점점 더 착한 아이틀에 자신을 쑤셔 넣어!"

"아니, 착하다는 것이 나쁜 말이야?"

"엄마, 저러다가 바보 될까 봐 그래."

"바보는 무슨 바보? 착한 것은 좋은 거야!"

"엄마도 참! 요즈음 아이엄마들은 자신의 아이가 착하다는 표현  안 좋아해! 바보멍청이로 들린다니까!"


나와 딸의 전화 내용이다. 세대차이인가? 나에게 '착하다'는 말은 좋은 말인데, 딸아이 세대에는 '착하다'는 말이 욕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딸은 '착한 아이 증후군'을 염려하는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 실제로는 화가 나는데 진짜 감정을 억압하고 '착한 척, 괜찮은 척' 하는 증상 말이다. 이렇게 억압된 감정은 쌓여있다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분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그때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좋다는 이론 말이다. '착한 아이 증후군'이라는 이 신조어를 만든 가토 다이조는 그의 저서 "착한 아이의 비극"에서 '타인으로부터 착한 아이라는 반응을 듣기 위해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심리적 콤플렉스를 뜻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착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이다.


현시대에서는 이 '착하다'의 의미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기 위해  SNS에서 '착하다'의 의미를 찾아봤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착하다의 의미는 호구나 만만하다는 의미에 더 가까움." 

어떤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다.

"너는 싫은 소리 안 하고 자기주장도 강하지 않고 편하게 참 말을 잘 들어!"


또 이런 말도 있었다.

"착하게 살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요. 착한 사람은 희생하면서 살아가야 해요. 그러니 좋은 사람으로 사세요. 그래야 스트레스를 덜 받고 사는 거예요."

바로 위의 말은 정말 신기한 정의이다. 상대방 위주가 되고 좀 손해나야, 아니면 자기 거 다 챙기고 심지어 남의 것까지 다 챙겨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착하지 않고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위의 말의 의미는 상대방에게 행동이 아니라(행동은 손해 나는 행위를 동반해야 하므로) 말로 상대방에게 동의해 주고 다독거려 주고 칭찬해 주는 것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선생님과 부모님으로부터 "착하게 살지 말어. 너 손해만 본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모든 기준점이 나 자신에게 있다. 당연하다! 내가 존재해야 우주가 존재하니까. 선생님이나 부모입장에서 보면 이 아이가 호구취급 당하고 손해 보고 상처받을  확률이 50% 이상이 되어 보이니까 사랑의 마음에서, 보호차원에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 얼마 전에 읽은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에 보면 착한 남자들이 여주인공 신유나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 줄줄이 죽는 일이 벌어진다. 이 책에서도 착한 사람이 당하게 되는 엄청난 피해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good and faitheful servant)(마태 25:21)"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착함과 충성됨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나는 두 종류의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두 사람 다 여전도회 회장인데, 한 사람은 착한 쪽이 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충성된 쪽이 강하다. 착한 여전도회 회장이 있는 곳에서는 활동이 늘 지지부진하다. 이 사람 형편, 저 사람 형편 다 들어주느라 일이 안 된다. 대신 원망은 별로 없다. 충성된 여전도회 회장이 있는  곳에는 착착 일이 잘 진행된다. 실적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 안에 원망과 불평이 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속성이 잘 조화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럼 성경에서 말하는 착하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성경에서는 명확한 기준점이 있다. 

첫째. 이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둘째, 이 일이 이웃사람에게 유익한가?이다. 


나 자신이 기준점이 아니고 하나님과 이웃이 기준점이다. 내가 손해 나도 이것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좋다면 이는 착한 일이다.  바보 되고 호구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의 기준점에서 볼 때, 좋은 일이라면 그것은 착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사람이고, 이웃의 형편에 공감하게 되어 행동하는 사람이다.


"찬희야. 성경에서 말하는 착한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고, 이웃을 잘 섬기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야!"


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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