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엄마 이야기
"어떻게 3번 만난 사람이랑 결혼할 수가 있어?"라고 내가 물으면 윤옥씨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때는 그렇게도 살았어. 엄마 봐라. 아빠랑 얼마나 잘 살았니?" 나는 명랑하게 대답하는 윤옥씨를 보며 참 대책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입을 샐쭉한다.
윤옥씨는 1960년에 흔하디 흔했던 어느 가난한 집에 장녀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얌정한' 사람이었어서 농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시대의 가장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 탓에 할머니는 시형님들에게 먹을 것을 꾸러 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넉넉하지 않은 시절이라 나눌 것이 부족했던 그들에게 눈총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할아버지 대신 일을 했다. 어린 이모를 업고 저 멀리 강원도 산골까지 다니며 봇짐에 담은 물건들을 팔았다고 했다. 그래서 어린 윤옥씨는 10살이 되기도 전에 가마솥을 닦아 동생들의 밥을 챙겨 먹였다고 했다. 살림이 넉넉치 않아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살림을 도맡았다. 그 시절이 윤옥씨의 어린 날 중 제일 무섭고 두려웠던 1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윤옥씨의 오빠가 취직을 하고 '엄마, 요즘에는 딸도 고등학교는 해야죠'라고 할머니를 설득해서 윤옥씨는 1년 늦게 여상에 진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부산에 있는 신발 공장에서 경리로 일을 하다가 그 시절 기준으로 노처녀가 되어 내 아빠와 선을 보았다. 모르는 남의 집 사랑방에서 처음 만난 맞선 날까지 합쳐서 3번을 만나고 그들은 결혼을 했다. 윤옥씨는 그 결혼을 사기 결혼이라고 가끔 말했는데 그 이유는 당사자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중매쟁이가 양가에 '상대가 마음에 든다고 한다'고 거짓말을 해서 성사된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윤옥씨는 결혼을 해서 내 아빠가 일 하던 곳에 신접 살림을 차렸다. 둘은 무난하게 살면서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낳았다. 윤옥씨는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였다.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은 경기 호황에 기대어 윤옥씨는 작은 가게를 열었다. 그렇게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아이들에게는 해 줄 수 있는 것들을 아끼지 않았다. 윤옥씨는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살았지만 누구도 피하지 못했던 경제 불황은 피하지 못 했다. 돈이 삶을 옥죄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행복한 집이 모두 부자인 것은 아니지만 부자인 집이 행복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것도 경험했다. 웃음 소리만 들리던 집에 침묵이 잦게 깔렸다.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해야 했고 제일 값싼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는 일에도 감사해야 했다. 그렇지만 윤옥씨는 계속해서 열심히 살았다. 이른 아침 일어나서 늦은 밤까지 일하면서도 내 손에는 물 한방울 묻히지 않았다. '엄마가 너무 어릴 때부터 일만 해서 일복이 많은 것 같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나는 윤옥씨 덕분에 곱게만 자랐다.
스무살이 된 내가 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내 아빠는 이런 저런 이유로 반대했지만 똑똑한 내 딸이 좋은 부모를 만났으면 더 좋았을거라고 아쉬워 하던 윤옥씨는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1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태어나서 처음으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와 윤옥씨는 무모하기 그지 없을 정도로 용감했다. 나는 멀고 낯선 나라에 빠르게 적응해 갔다. 매일 전화해서 다정하게 나를 응원해 준 윤옥씨 덕분이었다. 그런 윤옥씨가 어느 날 이상한 타이밍에 전화를 했다. 평소 전화하는 시간이 아니어서 나는 밖에 있었다. 가슴이 두근 두근 뛰었다. '응, 엄마아'하고 전화를 받자 윤옥씨가 희미하게 웃었다. '응 우리 예쁜 딸 잘 지내?'한다. 나는 적잖이 안도하며 윤옥씨랑 이야기했다. 윤옥씨는 늘상처럼 '응, 우리 딸 조금만 고생하자아'하고 전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 날, 윤옥씨는 병원에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내 아빠는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며칠이나 걸려서야 윤옥씨는 내게 그 사실을 알렸다.
"몇 달 안 남았대."
나는 온 세상에 다 들릴 정도로 유난스럽게 울었다. '몇 달'을 단어 그대로 받아 들인 나는 한달 반 뒤 종강에 맞춰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성격 급한 내 아빠는 그것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암 판정을 받은지 딱 한 달만에 윤옥씨는 장례식장에 앉게 되었다. 나는 이틀이나 지나서 윤옥씨 옆자리에 앉았다. 너무 늦게 와서 뭐가 뭔지도 몰랐다. 정신없이 시간이 지났다. 철이 없는 나는 입관하는 순서에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쳤다. 내가 기억하는 내 아빠와는 달리 너무 홀쭉해진 사진을 보고 있자니 저 관 안에 있는 사람이 내 아빠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언제나 나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윤옥씨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했다. 네 사람이 살던 집에 셋만이 돌아왔다. 동생은 다른 방에 들어가서 숨 죽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생이 울음을 터뜨렸다. 윤옥씨는 따라 울었다. 나는 따라 울었는지 가만히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윤옥씨는 그 뒤로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마치 윤옥씨의 엄마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윤옥씨의 가마솥을 물려 받지 않았다. 다시 먼 곳으로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윤옥씨에게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