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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한 큰 딸

아빠의 죽음 이후 나의 삶

by 오맑음


나는 어릴 때부터 별로 잘 하지 못한 일에도 늘 칭찬을 받았다. 첫 아이는 그런 것인가 보다. 다른 집 아이도 다 하는 일을 해도 나는 늘 윤옥씨의 칭찬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나이가 조금 들어서야 그것이 부담임을 알았다. 부모님이 금전적인 문제로 힘들어 하여도 내가 상장 같은 것들을 집에 가져가면 많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뭐든 잘 해서 기쁘게 해드려야겠다. 많은 것을 잘 하지는 못 했지만 못 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언뜻 생각해서 어른들이 싫어할 것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자신에 대한 연민을 키워 갔다. 내가 큰 딸이라서 받아 왔던 모든 이익은 잊고 내가 큰 딸이라서 받아야 했던 부담감에 대해서만 곱씹었다. 나는 그렇게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가족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하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 드디어 가족으로부터 멀리 도망을 나왔다. 그러나 나름의 엄청난 포부를 갖고 떠났던 유학길은 뜻하지 않은 아빠의 죽음으로 멈칫했다. 윤옥씨는 너무 작고 너무 마른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엄마로써는 누구보다 큰 사람이었다. 아빠의 죽음 이후 유학을 이어갈지를 결정하지 못 하는 내게 다시 돌아가서 공부를 하라고 용기를 주었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던 날을 잊지 못한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할 지 막막했다. 윤옥씨는 집에서, 나는 파리에서 그리고 동생은 서울에 따로 살았다. 나와 동생은 학생이었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약간의 용돈을 벌어서 쓸 뿐이었다. 우리 셋의 생계를 혼자서 다 감당해야 하는 윤옥씨는 앞으로 그 많은 경비를 어떻게 감당하려는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남은 우리 셋은 각자의 사정에만 깊이 빠지게 되었다. 서로에게 말하지 못 하는 것들이 쌓여 갔다.


윤옥씨는 계속해서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던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았다. 모녀는 그렇게 살았다. 한편, 어려서부터 유난히 아빠를 잘 따랐던 동생은 아직도 그 죽음의 그늘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균열은 벌어지고 있었지만 모녀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나는 주중에 학교를 다녔고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우울해 하기는 했지만 가끔 연애도 했다. 조금씩 삶이 겉보기에는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 했다.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질수록 나를 더 억눌렀다. 학교 생활도 잘 해야 한다. 생활비도 벌어 써야 한다. 아껴 써야 한다. 해야만 하는 것들은 너무 많았고 하고 싶은 것들은 경제적 이유나 시간 부족 등의 이런 저런 이유로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렇게 버틴 것이 3년이 되었다. 나는 원래도 혼자가 편하고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 즈음에는, 이제 와서 돌아보니, 유독 사람 많은 곳에서 이상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대강의실 수업을 들을 때면 백명이 넘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하교길에 학생들로 가득 찬 버스에서는 숨 쉬기 곤란할 정도로 숨이 가빴다. 그래도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학기말 시험을 끝내고 한국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들 떠 있었다. 가진 돈은 적었지만 한국에 갈 때는 윤옥씨에게 줄 작은 선물을 사서 갔다. 그 날도 윤옥씨에게 줄 선물을 사러 시내로 나왔다. 길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평소와 같지 못했다. 숨이 가빠지며 과호흡이 왔다. 길 한복판에 엎드린채로 쓰러졌다.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달려와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그 중 한 사람에게 폰을 건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친구에게 전화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친구가 올 때까지 내 옆자리를 지켜주었다. 친구가 오자 전후 사정을 이야기해주고 내 쾌유를 빌며 떠났다.


친구와 같이 병원에 갔다. 큰 특이점은 없었다. 나는 건강했다. 육체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나 검사를 받는 내내 나는 불안에 떨었다. 사람들과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손은 계속 의지와는 다르게 덜덜 떨렸다. 체온이 너무 떨어져서 한기를 느꼈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공황장애 진단을 내렸다. 나는 한국으로, 윤옥씨에게로 도망갔다. 윤옥씨 옆에서 나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윤옥씨가 마음 아파할까봐 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대신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 나를 윤옥씨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 뜻대로 하게 해주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았다. 무엇을 할지 몰라서 신림동으로 들어가 고시생이 되었다. 큰 이유는 없었다. 한국에서 빨리 자리를 잡아 우리 가족을 조금 쉬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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