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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봄, 어느 새벽, 파리

아빠의 죽음

by 오맑음

중심을 잃은 팔과 다리가 공중에서 허우적거렸다. 가뜩이나 휘청거리던 걸음이니 마치 헤엄치는 듯 했다. 시선을 떨어뜨리니 구두 굽이 부러져 있다. 쓸모 잃은 구두를 발에서 벗어버렸다. 바람이 분다. 그 흘러가는 것을 따라 팔을 뻗어 본다. 손의 테두리를 따라 형태를 그리는가 싶더니 이내 소매 자락을 살짝 흔든다. 또 다른 바람이 목을 훔치고 올라가 머리칼을 헤집으며 사라진다. 바람이 도시를 헤집고 다녔다. 꽃향기가 떠다녔고 흙냄새가 진하게 났다. 봄이었다. 거대한 아치형 문들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도시를 밝히고 있었다.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들과 각가지 말로 떠들어 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나는 가만히 서 있다. 한참이나 바닥에 돌들을 보며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개선문을 등지고 샹젤리제 대로를 따라 걸어간다. 얼마나 걸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콩코드 광장에 닿아있다. 광장을 휘감는 길을 따라 강 내음이 나는 쪽으로 나는 계속해 걷는다. 코끝으로 비릿한 냄새가 올라온다. 강가를 걷다보니 몸이 붕 떠오를 듯 가벼워진다. 마치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을 것처럼.




사람들은 잡을 수 없는 시간을 다리에 걸린 자물쇠에 걸었다. 영원을 약속하며 연인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댄다. 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시간을 여기에 영영 걸어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룰 수 없는 내 마음도 다리 한 구석에 걸어 놓는다. 길은 이어지고 다시 이어진다. 어느 성당의 광장에는 돌 판이 하나 있다. 그 네모난 돌 판에 별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그 영점을 밟으면 언제이건 어디서이건 꼭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을 하곤 했다.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아서 ‘꾸욱’ 밟는다. 떠나지 않아도 되게 해달라고 그 위에서 체중을 실어 한 번 더 ‘꾸욱’ 밟는다. 빛을 등지고 걷는다. 빛도 잠이든 생미셸 대로 쪽으로 걸어 내려간다. 여기서 집까지는 10분. 가로등 불빛만이 길을 비춘다. 길 끝에 닿자 틈 하나 없이 이웃의 벽에 의지하여 다닥다닥 지은 집들이 이룬 골목이 보인다. 최근에 파란색으로 덧칠한 거대한 문 앞에 선다. 가슴 높이 쯤에 있는 열쇠구멍에 두툼하고 묵직한 쇠로 된 열쇠를 돌린다. 여러 번 힘을 주어 돌리고 나서야 ‘딸깍’하고 여물고 있는 잠금장치를 놓는다. 둥글게 돌아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까치발을 들고 조심조심 올라간다. 늙고 낡은 계단은 삐걱 삐거걱 앓는 소리를 낸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한 구석에 놓인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씻지도 않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웅크리고 누워서 천정만 바라 봤다. 한 시간 쯤이나 지났을까. 전화가 왔다.


“너무 놀라지 말고 들으렴. 조금 전에 아빠가 돌아가셨단다. 바로 한국으로 들어와야 할 것 같구나.”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어른거리는 지시등, 시큰한 공기, 규칙적이지만 커다란 엔진음이 들려온다. 나는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 들어와 있다. 물고기는 까만 밤과 구름 사이를 유유히 헤엄친다. 머리 위에 별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별로 이어진다. 밤이 무르익자 까만 밤하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이 어두워진 물고기는 암초에 부딪쳤는지 가끔 몸을 부르르 떨지만 계속해서 부지런히 구름 사이를 가르며 헤엄친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간다. 밝은 빛이 비춘다. 눈이 시리다. 어둠속에 부유하던 마음이 내려앉는다. 물고기는 지느러미를 뻗어 땅을 짚는다. 땅에 박힐듯 몸통이 흔들린다. 짧고 강한 떨림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기만 하다. 물고기는 입을 크게 벌린다. 그 너머로 낯선 곳이 보인다. 물고기는 입을 더욱 크게 벌리고 나를 그 낯선 곳으로 토해낸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것 같은 이 곳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는 가만히 떨고 있다. 봄비가 여름 소나기같이 내리친다. 나는 나를 반절로 접은 것 같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길 위에 선다. 모든 것이 떠나 온 그때 그대로였지만 어떤 것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내 앞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닫히지 않는 문과 닫힌 문이. 닫히지 않는 문 앞에 나는 커다란 이민가방과 함께 서 있다. 신발이 질척하게 젖었다. 신발 탓을 하며 걸음을 멈춘다. 크게 한숨을 쉬고 한 발을 내딛는다. 경사로에 파 놓은 홈에 가방 바퀴가 걸린다.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바퀴 탓을 하며 다시 걸음을 붙잡는다. 닫힌 문이 열렸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걸어 올라온다. 그들은 담배 끝에 온기를 내고 깊은 숨을 들이 마쉰다. 곧이어 그들이 내뿜는 뜨겁고 가쁜 숨이 코에 걸려 걸음이 또 막힌다. 매캐한 연기가 눈을 찌른다. 연기 탓을 하며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어진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인사를 한다.

"아빠, 나 왔어." 그날 사람들은 나를 보았다. 내 두 손을 꼭 쥐었다.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이내 나를 꼭 안으며 말했다. “이제 아빠가 없으니 네가 엄마와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해.” 그들은 내 텅 비어버린 눈동자에 처연한 눈길을 보냈다. 그렇게 돌아서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시간이 계속 됐다. 그 날도 여느 날처럼 나는 배가 고팠고 졸음이 쏟아졌다. 엄마의 까만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고 끝나지 않을 검은 잠에 들고 싶었다.


5월이다. 이 말로도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날이다. 하늘은 맑았고 간혹 솜사탕 같은 구름이 한 점 씩 떠 있다. 들에는 작고 노란 들꽃들이 지천에 피어있다. 그 사이를 바람이 비집고 다닌다. 꽃 향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는다. 5월이다. 사람들은 이런 산골짜기에 마을이 있다는 것에 놀란다. 그 산골짜기에서도 언덕빼기에 햇살이 잘 드는 곳에 구덩이가 깊게 파여 있다. 처음 와 보는 곳도 아닌데 생경하다. 아빠 손을 잡고 할머니 댁에 와서 철모르고 뛰어다니던 어린 날에는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인다. 산은 생각보다 더 높다. 흙은 기억보다 더 거칠다. 주변이 너무 적막하다. 관이 내려진다. 어떤 이가 내게 삽으로 흙을 퍼서 그 위에 덮으라고 한다. 가만히 서서 내려진 관을 쳐다보고 있으니 그가 내 손에 삽을 쥐어 준다. 나는 여전히 차가운 바닥 속에 뚝 떨어져버린 관을 내려다보고 있다. 삽이 손에서 흘러내린다.


나는 뒤돌아서서 비탈길을 뛰어 내려갔다. 나는 흙을 덮지 못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직은 보내 줄 수가 없다. 땅 속이 너무 차가울 것 같다. 꽃도 이렇게 예쁘게 피었는데 땅 속에서는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아직은 5월이라서 나는 아빠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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