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고 있는 걸까
문득 이런 물음이 드는 날들이 있다. 하등 필요 없는 질문인걸 알면서도, 항상의 불안과 죄책, 때때로의 잠식 사이를 저울질하듯 살다 보면 그렇다. 그 와중에 내 장점 중 하나가 부정적 경험이나 기분을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잘 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나 가까운 미래만 종종거리며 살다, 어느 날은 무시하고 있던 과거나 사실에 마주하며 내가 나를 이토록 몰랐나,며 놀란다. 살려고 무의식적으로 묻어둔 것인지 의식적인 노력으로 그리한 것인지, 둘 다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일들이 많았고, 그것들의 중심인물은 부모이고 원가족임을 알곤 한다. 지금의 불안도 죄책도, 책임과 원인은 다 나를 향했는데, 이 모든 게 알고 보니 그들의 탓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분노가 차오르면서도 한구석마음이 편해지기도 하는게 역설이다.
내 삶을 잠식시키는 대상이 부모이고 원가족이라는 사실은 특별한 갈등이 없이도 그 사실 자체 하나만으로 굉장한 수치와 무기력을 가져다준다. 다행이도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는 필터링을 거쳐 남편과도 소통을 하는 편인데, 이 사실로 남편이 나를 절대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느낌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자주 이것이 남편과 관련한 것들로부터 내가 떳떳지 못하게하는 찝찝함이 있다. 반면에 사소한 데서 나와 갈등하다가도 결정적인 부분에서 나를 위해주는 남편의 모습에 모든 불만들이 와해되는 것으로 그에게 과도하게 감사하게 됨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원수를 용서하라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말을 몇 번이고 새기고,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호기롭게 새기던 날들의 나는 온 데 간데없다. 이미 내가 겸허와는 거리가 먼 인간임을 알지만, 더 그런 진리와는 떨어져, 모든 좋은 것들은 내가 만든 것이라고 믿고 싶고, 비겁하고 악독한 자처럼 보일지라도 약삭빠르고 그저 쉽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품고 십자가고 나발이고 벗어던지고 내 갈길만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보다 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되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진 않을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연애는 좋은 시작이었고, 어쩐지 육아를 시작하며 내 자식은 별개로 나를 키우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