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 좋은 선택

주거지를 옮기다

2021 가을, 뜬금없이 주거지를 옮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근래에 의뢰받은 원고와 제출 기한이 임박한 논문 등 제법 과제들이 쌓였다.

그래도 낼모레 이사를 하는 것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특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로 살 곳을 옮기는 것이 전혀 실감 나지 않은 터였다.


심지어 소위 올 인테리어 공사를 했는데도 단톡방에서의 프로젝트는 마치 회사 TF 마냥

공이 내게 오면 스슥, 확인하고 패스 하는 식으로 마치게 됐다.


이런식으로 내가 원하는대로 서재에 투명 아치문이 만들어졌고, 파우더룸의 화장대 대신에는

건식 세면대가 생겼다.


# 서재에 투명 문을 단 이유

하루에 반나절 이상을 뭔가 써대야 하는 사람에게 서재는 혼자만의 공간이면서도 외부와 연결되면 좋겠다.

밖의 세상과 단절을 원하지 않고, 숨쉬듯 소통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든다. 물리적으로 차단이 필요한 소음이라든지, 다른 가족의 프라이버시와 같은 것은 유리문으로 충분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아치형으로 할지, 아니면 반듯한 직사각형을 선택할지만 남은 상황이다.

@ 책에 핀 조명을 해주고 싶었다. 결국 하고 싶은 건 다 한 셈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 참에 20년 서울 살이를 마치고 경기도로 이사를 결심한 것이다.

동료들이 이미 오래 전에 서울을 떠나 한적함을 누렸던 것에 비해, 나는 그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도시의 시스템에 안정감을 누리고, 그것이 나의 통제 가능성을 보장해 준 것은 아닐까?

개인으로서는 적당한 타이밍이었지만, 주변을 보면 참 늦은 선택이다. 인내심이 좋거나 아이가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나는 어찌보면 참 트렌드에 약한 사람이다.

@ 장식용 건식 세면대

# 장식용입니다. 건식 세면대는.

남자 화장실은 실수로 한 번 가보긴 했지만,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아무튼 대체로 여자분들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탈탈 터는 경향이 있다.(아닌 분들께는 미리 사과를 드린다)

가끔 회사에서도 남이 뿌려 놓은 물기를 종이타월로 닦고 쓸 정도로 물이 튀는 것은 사양이다.

(아, 그런데 남편은 내가 발을 닦고 물기를 남기고 나온다고 불만이긴 하다)


그래서 세면대를 밖에 두고 싶어졌다. 이 세면대에서는 물을 쓰지 않는 것으로 했다.


예전에 디자이너인 동생이 큰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면,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 가방엔 늘 무거운 책이 한 권 이상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동생에게 물어보니, 원래 가방만 들고 다니는 것이란다.

뚜벅이인 나는 어쩔 수 없이 가방에 뭔가를 넣고 다녀야 해서, 결국에 교수님들이 죄다 에코백을 들고 다니는 것은 다 이유가 조금씩 있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그래서 저 세면대도 물을 쓰지 않기로 했다.


이제 적응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일단은 할 게 좀 있다. 연구자의 길로 들어선 이상 글 빚쟁이라고 하더니,

하나쓰면 하나가 또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난처한 점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는데 윗글이 인테리어 후기 글이 된 것이다.

어쩌다 보니 거주지를 옮겼는데, 살 곳이 바뀐 이 순간 굉장히 많은 부분들이 바뀐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다. 만나는 지점, 물리적 변화를 통해 사람들과의 관계가 좁혀지기도 멀어지기도 할 것이라는 게 새삼 신기하다.


여하튼 매력적인 일이다.


키나 성별, 인종을 바꿀 순 없는데 말이다.

거주지, 직장은 그래도 한 번 변화를 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변화에 가성비가 높은 일이 아닐까.

변화 그 자체만으로 다른 에너지, 새로운 일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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