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가 혼자 여행하는 법
"나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한데 혼자 바람 좀 쐬고 와도 될까? 목요일에는 내가 병원에 가야 하고 금요일에는 서방 무릎수술하는 날이니까 화수로 일박이라도."
일요일 저녁이었다.
"그럼 아예 2박으로 다녀오지 그래?"
"..."
혼자여행은 강릉이나 속초로 몇 번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이번에는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너무 멀면 운전만 하다 끝날 수도 있으니까 두어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어야 했으나 바다가 아니면 어째 기분이 나질 않는다.
서해 쪽은 내 취향이 아니라 강릉이 딱인데... 지금 강릉은 가뭄으로 난리 중이라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2박 3일의 여행이라...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금 더 멀리 갈 수도 있으니까.
가장 먼저 생각이 난 부산은 너무 복잡하고 운전난이도가 강남보다도 빡세게 느껴졌기에 패스. 진주 경주는 유적지도 한옥도 멋지지만 뭔가 바다느낌이 덜 느껴져서 패스. 거제도 좋았었는데 너무 멀지 않나 싶고...
"그럼 이참에 혼자 제주도 도전해 볼까?"
갑자기 제주도가 떠올랐다.
제주도 혼여는 나의 로망이긴 하지만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혼자서 차를 렌트해서 다닌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떨렸기에 그동안 섣불리 도전하지 못했었다. 내륙과는 난이도가 다르게 느껴져서 섣불리 시도하진 못하고 언젠간 가보겠다고 호언만 하면서 지내왔을 뿐.
그랬었는데...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가능할 것 같았다. 일요일 저녁에 나온 이야기이고 정말로 간다면 당장 내일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아무리 무계획 인간이라 해도 지금 시간에 비행기부터 렌터카, 호텔 예약을 한다는 것은 무리데쓰. 그렇지? 아무래도 이건 무리지? 에휴...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제주의 풍경은 떨쳐지지 않고 결국. 나를 항공권 예매창으로 이끌었다.
월요일 낮 김포에서 떠났다가 수요일 늦은 저녁 제주에서 돌아오는 일정으로 예매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일요일 밤이었다.
월요일 아침. 하늘은 흐렸고 내 마음은 더 흐렸다. 두려움과 귀찮음이 뒤섞인 채 먹구름처럼 밀려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혼자 제주도에 간다고? 말이 돼? 못할 거 같은데...
내가 없는 3일 동안 남편이 입을 출근룩을 겨우 챙겨두었을 뿐. 아직 여행짐도 싸지 않았다.
울적했던 내 기분 때문인지 중압감 때문인지 여행의 설렘은커녕 후회에 가까운 마음으로 갑갑해졌다.
무모했던 밤의 대가가 너무 크게 내 앞에 펼쳐졌다.
차를 쓰라는 남편의 호의를 거절하고, 월요병에 걸려 어깨가 쳐진 채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이 오히려 부러울 만큼 겁에 질린 나는, 허겁지겁 짐을 싸며 역시 중요한 결정은 밤에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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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2박 3일 여행에 위탁수하물까지 만들고 싶진 않았다.
평소엔 시간을 두루마리 휴지처럼 낭비하는 나이지만 지금부터 3일간의 시간은 금이니까 말이다.
'꼭 필요한' 짐들만 챙겼는데 집을 나서는 나는 배낭을 들쳐 매고 원통형처럼 생긴 망치가방?을 터질 듯이 채워 크로스로 매고 뒤뚱거리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주름도 늘고 어쩐지 '꼭 필요한' 짐도 느는 것 같다.
평소에는 인서울도 아니고 역세권도 아닌 곳에 거주하는 것에 큰 불만은 없다. 전업주부라 매일 출근지는 집이요 어디 카페로라도 출장 갈 일이 있다면 차로 이동하면 되기 때문에 오히려 한적하고 자연친화적인 것이 나의 라이프스타일에 잘 맞는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 없이 무거운 여행짐을 이고 지고 시간은 딱 맞춰가야 하는 오늘 같은 날에는 마음이 조급하고 부담스러워진다. 김포공항까지 버스와 지하철로 만 두 시간은 잡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는 감각이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오전. 나가기 이삼십 분 전에는 끝날 것 같아서 세탁기를 돌렸는데 계산이 달랐던지 이제 나가야 하는 시간인데도 세탁기 안의 빨래들은 마지막 헹굼의 트위스트를 추고 있다. 비행기를 놓칠까 마음은 타들어가지만 무슨 고집인지 나는 마지막 헹굼중인 빨래를 마무리하고 가고 싶었다.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출발하는 것 까지가 나의 계획이기에, 세탁이 끝나기까지 남은 15분을 머리 하는데 쓰기로 했다. 대충 섹션을 나눈 머리카락을 고데기로 지져보았다. 타들어가는 마음과 헹굼물과 함께 트위스트를 추기 시작하는 나의 머리카락들. 계획이 무의미할 정도로 쉽게 계획을 수정하고 변경하는 나이지만 오늘만큼은 대단한 의지로 계획대로 간다. 무엇을 위한 의지인지 모르겠지만 타협과 포기가 쉬운 나도 때때로 이렇게 고집스러워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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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될 일은 어떻게든 된다.
지하철 역으로 가는 버스도.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도 환승 노선까지도 너무나 완벽하게 딱딱 맞춰 탑승한 덕분에 (황당하게도) 오히려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해 버렸다.
비행기도 제때 떴고 제주도는 딱 좋은 기온과 우중충하지 않게 흐린 하늘은 낭만적이었다.
렌터카는 회사 다닐 때 타고 다녔던 레이로 선택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같이 반갑고 정겨운 레이. 뒷자리에 짐을 넣고 시동을 켜고 달리기 시작하니 비로소 내가 혼자 제주에 왔구나. 정말 왔구나. 실감이 났다.
"내 소원 하나 들어줄래?"
"뭔데?"
"제주도에 가면 날 위해 LP 바를 가줘"
"부담스러운데..."
남편이 왜 나에게 그런 소원을 말해서. 제주도의 첫 행선지는 바닷가에 새로 생긴 LP카페가 되었다.
지난겨울에 남편과 제주도에 왔을 때 처음 LP카페에 갔었다. 해 질 녘에 들어가서 칠흑 같은 밤도 한참이나 깊어졌을 때까지 음악을 듣고 또 들었었다. 붉디붉은 노을과 푸른 끼가 감돌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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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카페에 주차를 하고 내리니 바람이 과장 없이 내 몸을 흔들어 한걸음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애써 고데기로 우아하게 웨이브를 줬던 머리카락은 습한 바닷바람에 축 쳐지고 이리저리 나부끼고 있다.
그리고 내 몸을 흔들며 마구 휘몰아치는 바닷바람만큼이나 내 마음도 긴장으로 요동쳤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긴장하지 않은 척하며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홀로 앉는다. 옆자리엔 이미 혼자서 음악을 듣고 음료를 마시고 있는 (나보다) 젊은 여자 손님이 있다. 혼자이지만 주변을 의식하는 것 같지 않고 자연스럽고 평온해 보인다. 롤모델로 삼아야겠다.
롤모델의 옆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평일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LP를 고르러 일어난다. 무늬만 LP카페. 바다뷰는 멋졌지만 생각보다 적은 음반들에 놀랐다.
리베르탱고를 듣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라라랜드를 들으며 노을이 짙어가는 바다를 보았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음악을 듣다 보니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어쩌다 본 덕분에 또 다른 색감의 노을을 본 것 같은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