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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극가성비 호텔

-쫄보가 혼자 여행하는 법

by 알로하엘린

밤은 붉은빛에서 보랏빛으로 번져가더니 어느새 사방이 깜깜해졌다.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바게트 빵에 수제소스를 발라 먹으며 그렇게 남편이 내준 숙제는 훌륭히 마무리되고 있었지만 아직 서둘러 마쳐야 할 숙제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오늘 밤 어디서 잘 것인가!


그렇다. 나는 아직 내가 묵을 곳을 정하지 못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예정에 없던 여행인 데다 11월엔 오키나와 여행을 계획해 둔 터라 이왕이면 가성비 넘치는 여행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더러운 걸 몹시 무서워하고 최소한의 공간감과 미적 취향이 충족되어야 하는 비교적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인지라 가성비와 가심비를 모두 갖춘 숙소를 찾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괜찮아 보이는 몇 군데는 이미 예약이 다 찼고 깜깜해진 바다를 앞에 두고 앉아 있자니 나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그냥 가심비 빼고 가성비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잘못하다가는 노숙이라도 할 판이니.


그렇게 가까스로 예약한 호텔은.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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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좀 떨어진 야외주차장에 주차를 해야 하는 것은 괜찮았다. 물론 어두컴컴해서 무섭긴 했지만.

허나 호텔 건물로 들어서자 로비가 아닌 가요주점(?)이 나타난 것은 놀라웠다. 내가 들어간 입구는 1층 로비가 아닌 지하층으로 연결된 곳이어서 주점이 등장한 것이었다.

로비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러 우중충한 복도를 지나가는데 얼큰하게 취한 손님들이 휘청거리며 나왔는데 왜 그랬는지 순간 온 몸이 경직됐다.

일행이 있었다면 그렇게 무섭진 않았을 거 같은데 혼자서 밤에 낯선 곳에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웠다.

젊을 때는 더 깊은 밤 얼큰하게 취해서 흐느적거리며 거리를 걸어도 전혀 무섭지 않았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세상 무서운 것을 알아버려서 그런지 작은 것에도 경계심이 발동하곤 한다.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조금 안심이 되면서 긴장이 풀렸다.

싱글침대와 더블침대가 협탁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놓여있고 창가 쪽엔 스탠드 조명이 놓인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었다. 바닥은 카펫(불호), 티비는 살짝 작은 느낌이고 화장실과 욕실은 함께 있었다. 욕조는 없지만 혼자 쓰기엔 적당한 크기의 욕실. 그런대로 하룻밤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입구의 문이 자동으로는 잘 안 닫히는 것 같고(꾹 눌러줘야 비로소 닫혔다) 잠금고리가 달려있던 이중문고리를 뜯어낸 흔적이 찝찝했다. 이건 왜 뜯어낸 걸까? 쓰잘데기없는 상상력이 한밤중의 위험한 침입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 체크인할 때 몇 명이 투숙하냐는 질문에 "한 명이요"라고 대답한 것이 후회됐다.


애써 무서움을 털어내고 닫혀있는 커튼을 열어보니 맞은편엔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이 있었고 그 옆으론 단란주점 간판이 현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전혀 사실은 아닐 것이나 뭔가 실내 공기가 탁할 것 같은 느낌에 환기를 시키려고 반만 열리는 작은 창문을 열었더니 바로 아래 보도에서는 술 취한 사람들이 뭐라 뭐라 큰소리로 대화중이었다. 여기 2층에서 그들의 모습이 이렇게 잘 보이는 걸 보면 밖에서도 이 안이 훤히 보일 것 같아 커튼을 다시 닫았다.

안심할 수 없는 마음에는 온전한 휴식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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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저녁을 못 먹은 상태라 나는 씻기 전에 잠시 나가서 뭔가를 먹고 들어오든 포장해 오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갔다. 근처에는 뭐가 없는 것 같아서 호텔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조금 걸어가는데 보도 경계석(?)에 취객 두 명이 앉아서 헤롱 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얼른 뒤돌아 이번에는 호텔 왼쪽으로 이동했고 얼마못가 또다시 경계석(?)에 앉아 계신 취객을 만났다. 다시 뒷걸음질 치듯 돌아온 나는 결국 호텔 1층에 있는 세븐일레븐에서 김밥과 훈제란을 사서 방으로 호다닥 돌아와 문을 닫았다.

온 동네의 취객들이 다 이 호텔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 같았던 밤.


이중잠금장치를 뜯어낸 자리가 계속 머리에 남은 채 나는 사온 김밥과 훈제란을 먹고 샤워를 하고 잠옷을 챙겨 입고 집에서 가져온 허리배게를 받치고 침대에 반듯하니 누웠다. 두려움과는 별개로 피곤한 몸은 쉽게 잠에 들었다. 그리고 비몽사몽 하며 깊은 잠에 들기 전까지 내 귀에는 저 아래 지하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던 것 같다.


짧은 일정이지만 몇 번 혼자 여행의 경험이 있었는데 이렇게 낯설고 무서운 밤은 처음이었다.

마치 성공을 꿈꾸며 막연히 대도시로 향하는 가난한 젊은이가 어느 고속도로변의 낡은 호텔방에서 하룻밤 잠을 청할 때 느낄 것 같은 불안과 기대감과 고독 비스므리한 감정을 느꼈고, '나는 전설이다'란 영화에서처럼 아침이 오기까지 밖은 너무 위험해 보였다.

그렇게 과장된 감정과 나른해지는 몸뚱이가 나를 언밸런스한 꿈속으로 이끌었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조금 더 안전한 곳에 묵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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