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3. 검은 모래 해변과 쇠소깍

-쫄보가 혼자 여행하는 법

by 알로하엘린

밤새 어디 잡혀가는 건 아닌가 걱정하며 잠들었건만 나는 한 번을 깨지 않고 통잠을 잘만 자고 일어났다.

꼭꼭 닫아뒀던 커튼을 열고 창밖을 보니 날은 흐렸지만 맑았고(?) 세상은 다행히 안전해 보였다.

생존의 기쁨을 느끼며 부지런히 씻고 준비하고 체크아웃을 했다.



제주혼여2(2일-1)(1).png



오늘의 첫 행선지는 쇠소깍이었다.

출발 전에 십분 정도 산책을 하고 아아를 한 잔 사고 파랗고 맑은 하늘을 감상하며 기분을 끌어올린다. 지난밤에 취객들이 남긴 쓰레기들을 치우고 있는 할머니와 바람에 잔잔하게 나부끼는 이파리들과 아침부터 삼겹살을 굽고 있는 여행객들을 지나고 있자니 오롯하게 '내'가 느껴졌다. 낯선 곳을 걷고 있는 나의 걸음걸음과 아아를 들고 있는 손의 차가운 감각, 쫄보로써 오랜 세월 몸에 배어 버린 약간의 긴장감은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 나는 최선을 다해 이 순간을 즐기려고 하고 있었다.


아아 테이크아웃 미션을 클리어한 것에 뿌듯해하며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가... 려고 하는데 차단기가 올라가지 않는다! 힐링을 위해 아침 내내 빌드업을 해왔건만 그 순간 온몸의 땀구멍이 열리며 비상태세로 돌변해 버렸다.

몇만 원의 주차비를 정산하라는 표시가 뜨고 나는 당황해서 후진을 해 차를 세우고 호텔로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이멀전씨! 이멀전씨! 내 심장은 호들갑을 떨고 있는데, 호텔 측에서는 어제 분명히 주차등록을 다 해뒀었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다며 태연하게 차번호를 물어왔다. 휴.. 다행이다.. 안심도 잠시 '이 차번호가 뭐드라?' 렌터카 차번호가 생각이 안 나 다시 이멀전씨! 이멀전씨!! 차 안을 황급히 두리번 거린다. 그렇게 겨터파크가 개장하고 나서야 간신히 차키에 달려있는 번호를 알려줄 수 있었고 차단기가 올라가는 걸 보면서 나는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거참 이게 무슨 죽고 사는 일이라도 되는 것인지.


한번 쫄보는 영원한 쫄보인 걸까? 마지막까지 나를 철렁하게 해 준 첫날의 숙소를 뒤로 하고 나는 이제 혼자 여행의 둘째 날을 시작한다.


/


그리고 어떤 기억은 강렬했음에도 빨리 잊어버리기도 한다.

홀짝홀짝 아아를 마시며 부지런히 차를 달려와서 주차를 하고 보니 목적지인 쇠소깍 바로 옆에 검은 모래 해변이 있었다. 그동안 쇠소깍을 몇 번이나 와봤었는데 검은 모래해변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바로 코앞이니 검은 모래 해변부터 가보기로 했다.(사실 그렇게 궁금하진 않았다.)

'와이키키 해변'하면 떠오르는 사진같이 아주 쨍하고 파랗고 하얗고 반짝이는 전형적인 한여름의 바다를 좋아하는 나에게 검은 모래해변이라는 이름은 그닥 설레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냥 내 눈앞에 지금 나타나버렸으니 한번 봐주는 걸로. 기대 없이 터덜터덜.


모래는 하얘야지 왜 검으시냐고요..


그런데.



제주혼여2(2일-1)(11).png
제주혼여2(2일-1)(10).png



와우!


약간 흐린 하늘과 그 하늘색과 비슷한 톤의 바다와 그 바다보다 한층 검은 모래가 깔린 해변은 아름다웠다.

뭔가 기품 있게 사연 있는 이야기 같달까. 아니 아니.. 뭐랄까.. 어디를 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어떤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고 해야 할까.. 설명되지 않는 향수(鄕愁)는 아득한 과거를 향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머나먼 미래에 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채 계속해서 일렁이던 그날의 내 마음과 닮아 있던 검은 모래해변은 내 눈길을 딱 붙잡고 한참이나 놓아주지 않았다.

보고 있으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또 가늘게 뜨고 하늘과 구름과 수평선과 바다와 파도와 검은 모래를 보고 또 보았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으니 짠내를 한껏 품은 바닷바람이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뭐라는 겨.


아무튼 한마디로 멋진 풍경이었다는 말이다.





검은 모래해변을 따라 조금만 위로 걸어오면 쇠소깍이 나온다.


쇠소깍은 한라산에서 서귀포시 하효동으로 흐르는 효돈천의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기수역에 위치하고 있는 하천지형이다, 깊은 수심의 못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 울창한 송림이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폭포 위의 상류 부분은 하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하천지형이 매우 아름다운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주서귀포쇠소깍 [濟州西歸浦쇠소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주혼여2(2일-1)(14).png
제주혼여2(2일-1)(13).png



영롱한 에메랄드빛의 물빛이 청량하기 짝이 없는 곳.

카약을 타고 있는 사람들은 즐거운 표정이었고 일종의 유람선 같은 테우에는 단체관광객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흥분해서 왁자지껄하게 웃고 있었다. 근심 걱정 없어 보이는 얼굴들. 맑은 물 위를 떠다니는 그들을 보며 위안을 받는다. 나는 물 위에 있지 않고 여기 땅 위에서 그저 바라보고 있지만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초록초록한 기운을 느끼면서 데크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서 나는 두 명의 혼여행객과 한 쌍의 젊은 커플을 지나쳤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지나쳤을 테지만 내게 기억나는 사람들은 이들뿐이다.

특히 혼여행객들을 보면서는 혼자서도 편안한 모습으로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여행을 즐기는(것처럼 보이는) 것에 부러움을 느꼈다.

물론 나도 혼여행객이라면 혼여행객이지만 나는 나를 아니까. 내가 얼마나 속으로 쪼르보르하고 있는지. 온전히 나만의 여정에 몰두하고 싶으면서도 눈치 보느라 내가 얼마나 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지 말이다.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정말이지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데 말이다.



제주혼여2(2일-1)(16).png
제주혼여2(2일-1)(17).png
제주혼여2(2일-1)(18).png
제주혼여2(2일-1)(15).png


keyword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