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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바다의 색을 결정하는 것은 빛

-쫄보가 혼자 여행하는 법

by 알로하엘린 Mar 20. 2025



회 한 점을 입에 물고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하는 행복을 깨닫고는 잔뜩 부른 마음으로 침대에 대자로 뻗어버린 홍당무는 밤새 무거운 이불에 깔린 채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자고 있던 건지 깨어 있던 건지 모르게 꿈과 꿈 사이를 잇던 밤이 가고 막 새벽을 보낸 이른 아침. 불편한 잠자리에 뒤척이던 잠만보가 일찍도 일어났다. 

땀을 흘렸던 건지 이불속은 눅눅했고 후텁지근한 공기가 여행지답지 않게 무거웠다. 커튼을 열자 창밖은 아직 푸르딩딩한 채 흐리고 축축해 보였다. 안과 어울리는 밖.

보통 여행지에서는 피곤해도 빠릿하게 일어나는 편인데 잠을 못 자서인지 날씨가 흐려서인지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 창밖을 염탐하고는 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티비를 틀어놓고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본다. 



한동안 유행했던 '리즈시절'이라는 유튜브 쇼츠를 보았다. 

유명인들의 현재 모습과 젊은(리즈) 시절의 모습을 담은 짧은 영상들인데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내가 본 것들은 주로 외국 배우나 유명인들인데 모니카 벨루치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브룩 쉴즈, 데이비드 베컴 등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해서 내적 친밀감이 생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제 다들 어느 정도 늙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젊었던 시절을 이렇게 이어서 보니 새삼 세월이 빠르고 덧없다는 것이 느껴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샬롯 램플링. 

이름은 몰랐어도 영화에서 가끔 봤었는데 내가 처음 그녀를 봤을 땐 이미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가고 있는 듯한 시기였다. 따라서 나는 샬롯 램플링의 젊은 시절이 어땠는지는 당연히 몰랐고 어땠을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쇼츠에서 본 그녀의 젊은 시절 모습이 너무 예뻐서 놀랐다... 확실히 지금 모습과 닮았다. 그런데 너무 달랐다. 

다른 유명 배우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젊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사를 알고 있었는데 샬롯 램플링은 그렇지 않았다. 내게는 처음부터 중년 배우로만 기억되는데 이렇게나 어리고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당연히 있었을 것을 알면서도 눈으로 보니 그 간극에 충격을 받는다.



젊음에는 단순히 예쁘고 멋진 것뿐만이 아닌 생생하게 뿜어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돌아보면 찰나 같지만 너무나 찬란했던 그 시절. 몇 번쯤은 나도 들어봤던 젊음에 대한 찬사. 그땐 뭘 보고 감탄하는 걸까 의아했지만 이제 나도 알게 되었다.

결코 오지 않을 것 같던 중년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생소하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얼굴에도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세월이 드리워지는 것을 관찰하게 된다. 슬프면서도 기쁘고 아쉬우면서도 덤덤한 나의 주름들.

손에 닿으면 바로 녹아 없어지면서도 결국엔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눈처럼 세월은 그렇게 다가온다.



흐린 강릉의 바닷가, 어느 호텔방 안 침대에 새우처럼 옆으로 웅크려 누운 채 유명인들의 젊은 시절을 꼬리물기를 하며 보고 있는 부스스한 중년의 여인. 머리는 해모수요 잠옷 바지 한 짝은 무릎까지 올라가 있고 화장이 덜 지워져서 눈 밑은 거무죽죽하고 습관처럼 바르고 잔 립틴트로 쨍한 분홍빛 입술의 언발란스함까지.

자자. 늙어버린 유명인들의 젊은 시절을 아련해할 것 없이 이제 댁 외모체크나 하고 얼른 체크아웃하시라고요!




 

뜨거운 물로 몸을 거의 지지다시피 샤워를 하고 잘 먹지 않는 화장을 꾸역꾸역 해주고 우수수 나가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고데기로 단디 지져주었더니 한 5년 정도는 젊어진 것 같았다. (내 기분이.)

고작 하룻밤이었지만 내겐 필요한 것들이 꽤 많았던지 뚱뚱한 가방을 메고 체크아웃을 했다. 어디로 갈지 정한 것이 없어 일단 차에 짐을 두고 호텔 앞 바닷가를 잠시 산책하기로 했다. 



테이크아웃한 뜨아를 들고 천천히 걸으며 경포해변의 아침을 걷는다. 오늘 아침의 경포해변은 슬퍼 보이기도 하고 지쳐 보이기도 했다. 흐린 하늘은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지만 울지 못했고 검푸른 바다는 가슴에 품은 한을 풀고 싶으면서도 웬일인지 크게 일렁일 수 없었다. 실연당한 여인의 뒷모습 같기도 하고 전재산을 날려버린 한 가장의 축 처진 어깨 같기도 한 무거운 수분감이 느껴지는 바닷가.

하지만 이것은 지금 이 순간의 풍경일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엔 다시 쨍한 볕이 들고 푸르게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치고 모래알은 한 알 한 알 깨끗이 말라 바람 따라 스르르르 굴러다닐 것이다.



뜨거운 커피는 잠시동안 딱 좋은 온도로 나를 즐겁게 해 주다 금세 식어버렸다. 반도 마시지 못한 커피를 버리고 산책로를 쭉 걸어가자 예상치 못한 반가운 것이 나타났다. 광장 옆의 빨갛고 커다란 상자. 그것은 느린 우체통이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느린 우체통에 관심이 갔다. 안목해변에서도 다른 어딘가에서도 문득 마주칠 때면 소중한 사람(들)에게 엽서써서 부쳐보고 싶었다. 일 년을 지나 닿는 이야기. 뭔가 낭만적이고 애틋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기웃거리기만 하고 매번 그냥 지나쳤던 느린 우체통에 오늘은 엽서를 써서 부쳐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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