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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Sep 25. 2022

흐베즈다 별궁

구시가지 광장에서 출발한 마렉의 자동차는 스트라호프 터널을 지나 프라슈스키 오크로후 거리를 질주했다. 차에는 지니와 리즈도 타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어서 도로에는 자동차가 드물었다. 한산한 도로는 브르제브노프의 아파트 밀집지역을 지나브레제브노프 수도원까지 이어졌다.

“수도원에는 보테즈카라는 우물이 있지. 프라하에 불행이 다가오면 우물의 물 색깔이 변한다고 해. 최근에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신고가 경찰서에 접수됐지.”

마렉은 며칠 전 황금소로 소동을 겪은 이후 지니, 리즈에게 꽤 친절해졌다. 큰일을 겪은 탓에 친밀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지니가 마렉의 차를 타고 가는 것은 월요일 늦은 오후에 걸려온 휴대폰 전화 때문이었다. 호우스카 성에서 프라하로 막 돌아왔을 때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안드레이였다. 그는 도와달라고 했다. 자정 무렵에 마렉을 보낼 테니 차를 타고 함께 오면 된다고 했다. 마침 아빠는 다른 도시로 출장을 떠난 터여서 지니는 늦은 밤에 집에서 나가도 큰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수도원에서 5분 정도 더 달려가자 큰 언덕의 숲이 나타났다. 마렉은 언덕으로 들어가는 입구 바로 앞의 도로 한쪽에 차를 세웠다. 이미 적지 않은 자동차가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흐베즈다 언덕에 도착했어. 다른 유령관리인들은 벌써 출동해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단다. 자정이 넘으면 작전이 개시될 거야.”

마렉은 세 아이를 데리고 언덕의 숲 사이로 난 오솔길로 올라갔다. 매우 어두웠지만 손전등을 밝힌 데다 길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어 걷기에 힘들지는 않았다.

울창한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은 꽤 꼬불꼬불했다. 언덕 정상까지는 제법 멀었다. 1㎞는 충분히 넘고 2㎞ 가까이 될 것 같았다. 천천히 걷기도 했지만 목적지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 길 끝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다 왔어. 레토흐라덱 흐베즈다!”

마렉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옛날 왕들의 여름별궁이었지. 흐베즈다가 별이라는 뜻이니 정확한 의미는 별의 여름별궁이야.”

여름별궁 앞에는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별궁 주변에는 유령관리원들이 전자 장대를 세워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파우스트의 집에서 작전을 펼칠 때보다 장대는 훨씬 많아 보였다. 상공에는 드론 대여섯 대가 떠 있었다.

지니는 여름별궁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주 낯선 기운과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숲에 숨어서 별궁에서 벌어지는 일의 결과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지니는 그 기운과 시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유령관리원들이 흐베즈다의 여름별궁에 총집결한 것은 마법사 켈리 때문이었다. 지역주민의 신고 덕분에 그가 이곳에 숨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 이곳에서 이상한 비명이 들린다는 신고가 경찰서에 접수됐다. 이를 파악한 유령위원회는 프라하의 CCTV를 정밀하게 조사한 결과 파우스트의 집에서 소동이 벌어진 날 밤에 수상한 그림자가 이곳에 들어간 걸 알게 됐다.

“켈리는 왜 여기에 숨었을까요?”

마렉은 지니가 물어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답변을 내놓았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은 슬라브 전통신앙을 믿는 이교도가 희생물을 바치면서 제례를 거행하던 곳이었어. 인신공양이 벌어지기도 하고 대량학살이 일어나기도 했어. 그래서 프라하에서 가장 사악한 기운이 흐르는 곳이지.”

리느는 이해할 수 없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런 곳에 여름별궁을 지은 것이죠? 유령의 기운이 흘러넘치는데.”

마렉은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다들 유령을 좋아해서 그랬겠지? 하하!”

마렉은 제 입으로 말해놓고도 쑥스러운지 머리를 쓱쓱 긁었다.

“알려주려거든 제대로 알려줘.”

언제 온 것인지 안드레이가 뒤에 서 있었다.

“여름별궁은 삼각형 두 개를 포갠 헥사그램 즉 육선 성형 형태야. 헥사그램은 유령을 통제하는 힘을 가진 모양이지. 민감한 사람이 궁전에 들어가면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어. 궁전 한가운데에 서면 기가 가장 강해서 수맥 막대기가 흔들리고 추가 흔들린다는구나. 옛날 왕들은 이 궁전을 지어 유령을 억누르려고 했던 거야.”

지니는 여름별궁을 다시 쳐다보았다. 희미한 불빛에 둘러싸인 여름별궁은 정말 특이하게도 별 모양이었다.

지니가 호기심을 강하게 보이는 걸 느끼면서 안드레이는 설명을 이어갔다.

“건물을 헥사그램 모양으로 만든 것은 단순히 예뻐서가 아니었어. 모든 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지. 두 삼각형 중에서 윗부분은 불을, 아랫부분은 물을 상징해. 불은 사악한 기운을 태워 없애고, 물은 사악한 기운을 정화한다는 뜻을 담고 있지. 여름별궁에 들어가면 곳곳에 불과 물의 이미지가 장식돼 있어. 지하에는 흙, 1층에는 공기가 묘사돼 있지. 둘 다 인간세상을 상징하는 거야. 중간세계나 저승에는 없고 인간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지니는 여름별궁으로 가까이 갈수록 안에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기운을 더 강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유령을 알게 된 이후 인간세상에서는 처음 느끼는 기운이었다.

‘스비아토!’

지니는 중간세계에서 경험한 스비아토의 시선을 생각했다.

‘그의 시선에서도 이런 기운이 느껴졌어. 물론 그의 기운이 훨씬 강했지만.’

안드레이는 여름별궁 주변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유령관리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최근 며칠 동안 여러 유령을 만나 물어봤어. 그제야 켈리의 속셈을 알겠더군. 철학자의 돌을 원한 이유를 말이지. 철학자의 돌은 흙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고, 유령을 되살릴 수 있고, 우주의 진리를 깨달을 수도 있는 기적의 돌이야. 그자는 유령에서 인간으로 부활하고 싶은 거야.”

어둠이 덮인 오솔길에서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걸어왔다. 파우스트의 집에서 유령관리인들을 지휘한 마테이 노박이었다.

“사장님, 벌써 오셨군요.”

노박은 리즈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니를 본 적은 없었다. 안드레이에게서 이야기만 들은 게 고작이었다. 그는 지니를 보며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네가 지니로구나. 나는 노박이란다. 마테이 노박. 안드레이 씨랑 함께 일하지.”

지니는 커다란 노박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리고 안드레이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켈리는 철학자의 돌을 찾아서 중간세계로 가지고 가려고 하는 거예요.”

“뭐라고?”

안드레이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지니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얼굴빛은 순식간에 흐려졌다.

“그게 무슨 말이니? 철학자의 돌을 중간세계로 가져간다니?”

지니는 여름별궁의 담벼락에 손을 댔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니야, 왜 그러니?”

리즈는 지니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였지만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아주 낯선 장면이었다.

안드레이는 지니를 재촉하지 않고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기다렸다.

“먼 옛날에는 이곳에서 중간세계로 이어지는 구멍이 있었네요.”

안드레이는 예상하지 못했던 지니의 말이 경악스러운 듯 대꾸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그걸 네가 어떻게?”

“스비아토가 여름별궁 아래에 묻힌 그 구멍을 통해 저를 노려보는 게 느껴져요.”

안드레이는 물론 노박, 리즈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스비아토가 너를 노려보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그는 중간세계에 있는데 어떻게 너를 노려본다는 거니?”

지니는 여름별궁 정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일이 끝나면 상세히 말씀드릴게요.”

안드레이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한참동안이나 지니를 주시했다. 보면 볼수록 만나면 만날수록 신기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좌관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여름별궁 근처에서 작업을 하던 유령관리인 한 명이 노박에게 다가왔다.

노박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일단 초단파와 자외선부터 작동시켜. 그리고 골렘을 투입해.”

“알겠습니다.”

안드레이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걸로 그놈을 잡을 수 있을까? 지난번보다 더 강해졌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야로미르가 살아 있다면 다른 방도를 강구할 수 있을 텐데.”

노박과 안드레이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유령관리인들은 초단파와 자외선 막대에 전기를 흘려보내는 스위치를 눌렀다. 하늘에 날아다니는 드론은 손전등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한 파란 빛을 여름별궁 곳곳으로 발산했다. 하얀색인 여름별궁은 순식간에 흰색과 파란색이 교차하는 낯선 건물로 변해버렸다.

기이잉!

듣기 거북한 기계음과 함께 여름별궁 한쪽 구석에 서 있던 대형트럭 짐칸의 문이 열렸다. 짐칸에서 경사로가 아래로 내려오더니 무언가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로봇 같은 거대한 형체가 여름별궁 정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로봇은 아주 둔탁한 모양이었다. 머리는 럭비공을 반 잘라 붙인 것 같았다. 몸통은 모서리가 닳은 커다란 사각형 바위 형태였다. 무릎까지 내려온 팔은 굵직했고 짧은 다리는 매우 튼튼했다.

“저건 골렘?”

리즈는 눈을 삼박거리며 반가운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안드레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골렘인 거예요?”

리즈는 여전히 밝게 웃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과학기술을 이용해 중세의 골렘을 로봇으로 만들었어. 유령관리인이 직접 나서기에 너무 위험한 일이 생기면 골렘을 보내는 거란다.”

골렘은 여름별궁 정문을 지나 로비의 나선형 통로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로비에 먼저 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던 유령관리인들은 환한 불빛을 내는 발광 공 여러 개를 지하로 던져 넣었다. 다른 요원은 소형 드론 두 대를 날려 보냈다.

안드레이와 노박은 궁전 앞 잔디밭의 테이블 위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갔다. 골렘이 지하실로 내려가는 모습이 영상으로 흘러나왔다. 폭이 좁은 계단이었지만 그는 걸음을 걷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지하실 한가운데에 유리를 덮은 육각형 전시대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누군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켈리!”

주변에는 유령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저렇게 많은 정령을 빼앗았다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상태인 게 분명했다. 몸에서는 불그스레한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빨간 색은 철학자의 돌 색깔인데….”

안드레이는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지하실에는 적지 않은 양의 흙이 쌓여 있었다. 켈리의 몸도 흙투성이였다. 입 주변에도 지저분하게 흙이 묻어 있었다.

“저 흙은 무엇인가요?”

지니는 손가락으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안드레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다. 많은 유령을 상대해봤지만 저런 장면은 처음 보는구나.”

노박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입가에 흙이 묻은 걸 보면 흙을 먹었다는 거네요. 흙을 왜 먹었지?”

안드레이는 스크린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저자의 속셈이 도대체 무엇이지?”

불안한 기색의 노박은 안드레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안드레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삐리링!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골렘의 두 손바닥에서 아주 굵은 파란빛이 튀어나왔다. 손전등에서 나오는 빛과 비슷했지만 훨씬 굵고 색깔도 진했다.

노박은 두 손을 꼭 쥐었다.

“성인 남자 열 명 정도는 한손으로 제압할 수 있는 힘입니다. 켈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골렘은 파란빛을 휘둘러 켈리의 허리를 거칠게 붙잡았다. 전시대에서 들어 올려 밖으로 끌어내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를 써도 켈리는 뿌리가 땅 끝까지 박힌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펑!”

굉음이 나더니 골렘의 손바닥에서 나온 파란빛은 끊어지고 말았다. 골렘은 균형을 잃고 뒤로 밀려나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쿵!

얼마나 세게 부딪힌 것인지 여름별궁이 미세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진동의 영향으로 스크린 화면은 지지직거리며 흐려졌다.

골렘은 두 손을 짚고 다시 일어섰다. 이번에는 손바닥에서 빨간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순식간에 켈리의 허리를 휘감았다.

노박이 소리를 질렀다.

“드론 조종사! 그물을 던져!”

드론은 켈리의 머리 바로 위로 날아갔다. 곧바로 배 부분을 열더니 둥근 공을 아래로 던졌다. 마렉이 파우스트의 집에서 사용한 것과 똑같은 공이었다.

펑!

드론에서 튀어나온 공은 파란빛을 내며 순식간에 그물처럼 펼쳐졌다. 그물은 켈리의 머리 아래로 떨어지며 온몸을 감쌌다.

켈리는 여전히 자세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빨간빛과 파란색 그물에 맞서 버티려고 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전시대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불과 며칠 전 파우스트의 집에서 공격을 받을 때는 그래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스크린을 보던 노박은 조바심을 내며 전전긍긍했다.

“유령관리인들도 들어가. 골렘의 공격에 힘을 보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잡을 수 있어.”

노박의 지시를 받은 유령관리인 10여 명이 지하로 달려갔다. 스크린에는 그들이 지하에 내려가 조심스럽게 켈리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담겼다.

유령관리인들은 일제히 손전등의 빨간 버튼을 눌러 빨간빛을 켈리에게 집어던졌다. 일부는 둥근 공을 켈리의 머리에 더 던져 그물을 중첩시키기도 했다.

켈리는 그래도 꿈쩍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묵묵히 공격을 견디던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물과 빨간빛을 온몸에 매단 채 허공으로 살짝 날아올랐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골렘의 머리를 붙잡아 힘껏 집어 던졌다.

“쿵!”

골렘은 순식간에 지하실 한쪽 구석으로 날아가 처박히고 말았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오른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켈리는 그를 다시 들어 올려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집어던졌다. 거듭해서 나동댕이쳐진 그의 왼쪽 다리는 뭉쳐놓은 모래가 흩어지듯 산산조각 나버렸다.

켈리는 이번에는 허리와 온 몸을 감싼 빨간빛을 밧줄을 당기듯 천천히 붙잡았다. 유령관리인들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온몸을 뒤로 젖혀 버텼다. 켈리는 빨간빛을 두 손에 모아 머리 위로 들어 돌리기 시작했다.

“으아앗!”

유령관리인들은 마치 돌개바람에 휘말려든 것처럼 둥근 원을 그리며 허공에서 맴돌았다.

켈리는 그들을 서너 번 회전시킨 다음 골렘이 나뒹군 벽으로 집어던졌다.

쿵!

유령관리인들은 모두 벽에 처박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큰일 났군.”

노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 버튼을 누르고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나머지는 모두 다 빠져나와. 위험해. 그자가 위로 올라와 공격을 시작할 거야.”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여름별궁 로비에 있던 유령관리인들은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왔다. 외곽에 서 있던 유령관리인들은 스크린 옆으로 모였다. 모두 유령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손전등을 들고 있었지만 상대하기 불가능한 악마를 만난 듯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켈리는 지하실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굳이 문을 거치지 않고 벽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안드레이는 입구 앞으로 걸어가 그를 가로막았다.

“대단하군. 며칠 사이에 힘이 엄청나게 강해졌어.”

안드레이는 무섭지도 않은지 켈리 앞에서도 담담하고 느긋했다. 로봇 골렘과 유령관리인의 집단 공격도 박살이 났는데 도대체 무얼 믿고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안드레이와 달리 긴장한 노박의 얼굴은 실룩거리고 있었다.

“철학자의 돌은 정말 대단한 물질이야. 그렇지 않나?”

켈리는 히죽거리며 안드레이에게 다가갔다. 아직 공격할 뜻은 없어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혼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철학자의 돌이라니 무슨 뜻이지?”

“자네 덕분에 돌가루를 일부나마 마실 수 있었어. 그건 고맙게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야?”

켈리는 껄껄거리며 크게 웃었다.

“자네 머릿속에 프루소바가 해준 이야기가 그대로 남아있더군.”

안드레이는 파우스트의 집에서 켈리의 공격을 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랬군. 나를 공격하면서 기억을 빼앗아갔던 거야.”

“유령위원회 정보를 빼내려면 자네만한 도서관이 어디에 있겠나?”

켈리는 오른손을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큭!”

안드레이는 두 손으로 목을 감쌌다. 갑자기 엄청난 힘이 목을 졸랐다.

켈리는 이번에는 오른손을 약간 위로 들어올렸다.

안드레이의 몸은 조금씩 허공으로 솟았다.

“프루소바가 철학자의 돌에서 나온 가루를 버렸다고 하더군. 어디에 버렸는지 알아보기로 했지. 자네의 머리를 통해 그녀의 가슴에 들어가 보니 이곳이 나오더군.”

안드레이의 안색은 서서히 창백해졌다. 목이 졸려 숨을 쉬는 게 어려운 모양이었다.

“킬킬. 흐베즈다 언덕의 유령들에게 물어봤지. 그녀가 어디에 돌가루를 버렸는지. 그랬더니 정확한 위치가 나왔어.”

“도…도대체 어…얼마나 흡…흡입했기에 그…그렇게 변했지?”

“가루를 제대로 구한 건 아니야. 대부분 사라지고 찌꺼기만 흙에 섞여 남았더군. 1주일 동안 매일 밤 근처의 흙을 모조리 빨아먹었지만 겨우 기운만 느낄 수 있을 정도였어. 앞으로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 한 달 정도 흡입하면 제대로 된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켈리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웃음 뒤에는 싸늘하고 잔혹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더 높이 들어올렸다.

“로젠크로이츠니 철학자의 돌이니 하는 이야기도 나오더군. 내가 찾는 게 바로 그거였어. 아쉽게도 그 부분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 자네 머리에도 일정단 단계를 넘어서면 외부 침입을 차단하는 방어막이 처져 있었지. 나중에 마틸다 프루소바를 다시 찾아가 알아보면 되니 아무런 문제도 아니지만.”

켈리의 손이 올라갈수록 안드레이는 더 높이 치솟았다. 이대로 끌려올라가다가 땅에 떨어질 경우 그대로 즉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풀어줘.”

노박 옆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던 지니가 결국 앞으로 나섰다.

켈리는 오른손을 그대로 둔 채 곁눈질로 지니를 노려보았다.

“아! 너도 여기에 왔구나. 잘됐군. 힘을 회복하면 너를 찾으러 다녀야했는데 그런 수고를 덜어주다니.”

지니는 팔찌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몸에서 노란빛이 파장처럼 흘러나왔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할아버지를 내려줘. 그렇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낄낄! 이렇게 말이냐?”

켈리는 지니의 말을 무시하는 것처럼 오른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안드레이는 바람에 휘말려 이리저리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속절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지니는 손전등의 파란 단추를 눌렀다. 손전등에서 아주 굵은 파란빛 채찍이 튀어나왔다.

“마지막 경고야. 어서 할아버지를 내려줘.”

켈리는 차가운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오른손을 들고 지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파란빛은 물론 노란빛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지막 경고? 무서운 말이군. 낄낄.”

지니는 허공을 향해 빛 채찍을 힘차게 휘둘렀다.

휙!

날카로운 소리가 흐베즈다 언덕의 밤공기를 가르며 하늘로 날아갔다.

켈리는 걸음을 멈추고 오른손을 내렸다.

“으악!”

안드레이는 하릴없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툭!

“사장님!”

“할아버지!”

노박과 마렉, 리즈는 안드레이에게 달려갔다.

“으으~!”

안드레이는 드러누운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노박은 안드레의 머리 아래에 손을 집어넣었다.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신가요?”

“온…온몸이, 뼈…가, 다 부…부서진 것 같아.”

지니는 오른손으로 빛 채찍을 조절하면서 곁눈질로 안드레이를 흘끔거렸다. 지니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봐도 초초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도 몰랐지만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켈리는 두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머리도 하늘을 향해 들었다. 그는 깊숙이 심호흡을 했다. 이번에 결판을 보겠다는 것처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스비아토 님께서 끝장을 보라고 하시는구나. 지난번에는 중간세계로 끌고 오라고 하시더니 마음을 바꾸신 모양이야. 너도 그걸 느끼고 있겠지? 분노한 그분의 시선을.”

켈리는 두 손을 든 채 지니를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분께서 무덤을 만들지 못하게 네 시신을 늑대 밥으로 주라고 지시하시는구나. 네 어미와 함께 영원히 중간세계에 갇혀 살게 하라고.”

켈리가 엄마 이야기를 꺼내자 지니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나중에 엄마를 중간세계에서 구해올 거야. 편안하게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할 거야.”

“낄낄낄! 천국이라고? 네가 루드밀라를 중간세계에서 구해낸다고? 오늘 여기서 숨이 끊어질 건데 어떻게?”

켈리는 며칠 전에 호되게 당했던 지니의 빛 채찍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네가 착각하는구나. 지금의 나는 며칠 전 너에게 쩔쩔매던 내가 아닌 걸 모르는 모양이군.”

켈리는 손등을 바깥쪽으로 한 채 두 손을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연거푸 중얼거렸다.

“마네스, 우트 데 인페르노 쿠레레 에트 오키데레 에암!”

주문을 다 외운 켈리는 이번에는 손등을 위로 한 채 두 손을 앞으로 힘껏 미는 것처럼 펼쳤다.

크아악!

켈리의 손끝에서 끔찍한 비명과 함께 시뻘건 연기가 피어났다. 연기는 앞으로 나가면서 조금씩 형상을 갖췄다. 잔혹하고 처참한 모습이었다. 온갖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유령들의 얼굴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뻘건 피를 흘리는 유령, 안광이 흉흉한 해골과 뼈만 남은 유령, 목이 잘린 채 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흩날리는 유령이 일시에 끔찍한 비명을 내뱉었다. 유령들은 지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란색 빛 경계선 주변을 오가며 끊임없이 날카로운 신음을 발산했다.

크아악~

“으윽!”

노박과 마렉, 리즈는 머리를 땅에 박고 귀를 막은 채 신음했다. 유령의 비명은 바늘처럼 귀를 파고들며 끔찍한 고통을 주었다. 통증은 심장까지 전해질 정도로 극심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지니는 예상치 못한 유령의 공격에 당황하면서 두 손으로 귀를 가렸다. 그렇지만 유령의 괴성이 귀를 파고드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 밀려서는 안 돼.’

지니는 귀를 가린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노란빛의 파장을 키웠다. 지니 주변에만 머물러 있던 빛은 순식간에 언덕 전체로 퍼져나갔다.

크아악!

유령은 이번에는 다른 비명을 질렀다. 사람의 귀를 후벼 파는 것 같은 통증을 주는 소음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 같은 절규였다.

지니는 귀를 찢는 통증이 사라지고 바싹 마른 짚단이 타는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켈리의 손에서 나온 여러 유령이 노란빛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킬킬! 내가 너를 너무 무시했구나. 내가 변한 만큼 너도 꽤 변했을 텐데 그걸 생각하지 못했군.”

유령의 비명을 잠재운 지니는 손전등의 파란 단추를 다시 눌렀다. 아주 굵고 강력한 빛 채찍이 튀어나왔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빛 채찍을 켈리에게 휘둘렀다.

휙!

철썩!

켈리는 피하는 대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빛 채찍을 오른손으로 힘껏 붙잡았다.

지지직!

켈리의 팔에서 살갗이 타는 것처럼 연기가 솟았다.

“역시 예상대로야.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강하군.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켈리는 오른손과 엇갈리게 왼손으로 빛 채찍을 붙잡았다. 정신을 집중한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손에서는 피처럼 붉은 빛이 흘러나오더니 엄청나게 높은 전기가 새는 것처럼 불꽃이 튀었다. 전기는 파란빛 채찍으로 넘어가 지니의 손전등으로 전해졌다.

파직!

“아악!”

지니의 손전등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 채찍은 순식간에 끊어져 버렸다. 그는 팽팽한 줄에서 튀겨져 나가는 돌처럼 허공을 날더니 여름별궁의 벽에 쿵 하고 부딪히며 떨어졌다.

“지니야!”

지니와 켈리의 대결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리즈는 소리를 질렀다. 그는 여름별궁의 벽 앞에 쓰러진 지니에게 달려갔다.

“지니야! 정신 차려. 괜찮니?”

지니는 가벼운 신음을 내며 등을 일으켰다.

“아직까지는 괜찮아.”

노박도 지니에게 뛰어왔다. 쓰러진 안드레이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만 저을 뿐이었다.

“얘야! 다치지 않았니?”

지니는 노박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는지 몸을 일으키면서 약간 비틀거렸다.

‘팔찌에서 나오는 빛 채찍이 있어야 해. 하지만 주문을 모르니 방법이 없구나.’

지니는 팔찌를 다시 쓰다듬었다. 노란색 빛이 다시 그의 몸 주위를 에워쌌다. 하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연하고 범위도 좁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손전등을 주워 파란색 단추를 눌렀다. 다시 빛 채찍이 튀어나왔다.

켈리는 그런 지니의 모습을 보면서 큰소리로 비웃었다.

“낄낄! 스비아토 님의 말씀이 맞는군. 아직 팔찌를 이용하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는 거야. 그래서 찌질한 유령관리인이 사용하는 손전등에만 의존하지. 꼬마야, 그걸로 나와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지니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켈리가 그의 약점을 안다고 생각하니 더욱 긴장이 되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했다.

‘방법이 없어. 한 번 더 공격을 시도해봐야겠어.’

지니는 온힘을 모아 채찍을 다시 휘둘렀다.

휘익!

턱!

켈리는 이번에도 채찍을 손으로 붙잡아버렸다.

지니는 채찍을 빼내기 위해 손전등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켈리가 얼마나 단단하게 붙잡았던지 채찍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스비아토 님께서 원하시는 게 있어. 너도 잘 알 거야. 철학자의 돌을 구해서 힘을 키워 중간세계에서 벗어나시는 것이지. 너를 끝으로 프라하의 유령위원회를 박살내면 프루소바를 찾아가서 철학자의 돌을 찾을 거야. 그것만 있으면 인간세상은 이제 스비아토 님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거지. 나는 그분의 충직한 수하로 남아 있고. 낄낄.”

켈리는 채찍을 붙잡은 오른손을 위로 빠르게 들어올렸다.

“으악!”

지니는 채찍을 따라 허공으로 휙 하고 날아갔다.

켈리는 이번에는 오른손을 반대쪽으로 흔들었다. 채찍은 뚝 소리를 내며 끊어져버렸다.

“으악!”

지니는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날아가 여름별궁 앞의 공터에 쿵 하고 떨어졌다.

켈리는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지니에게 다가갔다. 그는 지니의 머리에 손을 댔다. 머리를 뒤집어서 여러 정보를 캐낸 뒤 그대로 살해할 생각이었다.

“앗, 뜨거워.”

켈리는 화들짝 놀라며 오른손을 뒤로 뺐다. 지니의 머리에 손을 대는 순간 뜨거운 불에 손을 넣은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아직 어려서 기술이 부족하지만 역시 보통 아이가 아니구나. 기절했는데도 내 손이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거 막다니! 선천적 능력만큼은 야로미르나 루드밀라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르겠어. 스비아토 신의 말씀처럼 살려두면 후환이 될 거야.”

켈리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뒤 오른손을 들었다. 저항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지니는 그대로 하늘로 끌려갔다. 켈리는 오른손을 계속 더 높이 들어올렸다. 지니는 흐베즈다 숲에서 가장 큰 나무를 넘어 한참 위의 먹구름이 있는 곳까지 끌려갔다.

“지니야! 안 돼!”

지니가 정신을 잃고 하늘로 끌려올라가는 걸 본 리즈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호주머니에 든 손전등을 만지작거렸지만 꺼낼 용기를 갖지는 못했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지니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걸 보고 켈리에게 대들 마음을 끌어올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니야! 정신 차려.”

리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엉엉 울면서 하늘 높은 곳에서는 안 들릴지도 모를 소리를 힘껏 지르는 것뿐이었다.

지니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두 번이나 허공에서 내동댕이질을 당한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6학년에 불과한 어린 여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지니는 기절한 채 꿈을 꾸었다. 아빠가 회사에 나간 뒤 혼자 집에 남았을 때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하던 꿈이었다. 그때와는 달리 그의 등에는 하얀 날개가 달려 있었다.

‘내가 천사가 된 건가?’

지니는 상큼한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 사이를 신나게 날아다녔다. 주변을 지나던 새들이 짹짹거리며 신나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구름 아래로는 구불구불한 블타바 강이 가벼운 물살을 일으키며 바다를 향해 달렸다. 그는 머리를 높이 들고 날개에 힘을 주었다. 그는 구름을 두 개, 세 개 뚫고 하늘로 더 높이 날았다.

‘엄마!’

구름 너머에 엄마가 서 있었다. 지니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아니면 일에 집중한 것인지 지니를 모른 체했다.

지니는 날개를 퍼덕여 엄마 곁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엄마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멀어진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지니는 눈을 비비고 엄마를 다시 쳐다봤다. 분명히 엄마였다. 엄마 앞에는 커다란 화로가 놓여 있었다.

‘호우스카 성에 있는 화로로구나. 엄마는 저것으로 무얼 하려는 거지?’

엄마는 작은 집게로 작은 통나무와 검은 숯을 차례로 집어 화로에 집어넣었다. 화로에서 잠시 연기가 나더니 불이 활활 타올랐다.

지니는 불을 피우는 엄마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엄마가 했던 말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화로의 불은 유령에 맞서 인간세상의 평화를 지켜주는 기운이자 상징이야. 불이 꺼지면 평화가 사라지고, 어둠 속에 숨은 유령의 사악한 기운이 터져 나오게 돼. 그래서 이 불을 평화의 불이라는 뜻인 오헤니 미루라고 불러.’

평화의 불! 오헤니 미루! 그렇구나. 이것이구나. 오헤니 미루.

지니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빠른 속도로 허공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래에서 시뻘건 빛을 내뿜는 켈리의 눈이 보였다. 정신을 차리라며 소리를 지르는 리즈의 눈물 섞인 얼굴도 보였다.

지니는 팔찌를 쳐다보았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팔찌에서 노란 빛이 반짝였다. 그는 팔찌를 쓰다듬으며 주문을 거듭 외웠다.

“오헤니 미루! 오헤니 미루! 오헤니 미루!”

맨 마지막에 외운 주문은 거의 절규나 마찬가지였다. 지니의 부르짖음은 어둠에 휩싸인 흐베즈다 언덕을 넘어 프라하 시내에까지 퍼져나갔다.

“오헤니 미루! 오헤니 미루!”

추락하던 지니의 몸이 땅바닥에 닿기 딱 1m 전에 멈춘 것은 다섯 번째로 주문을 외웠을 때였다. 이른 아침에 해가 산 위로 떠오를 때 햇살이 사방으로 퍼지는 것처럼 그의 손목에 감긴 팔찌에서 나온 노란빛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지니의 온몸을 감싼 빛은 마치 지지대처럼 버티고 서서 지니가 땅에 떨어져 충격을 받지 않게 도와주었다. 거꾸로 떨어지는 지니는 무중력 상태에서 걷는 것처럼 빛 속에서 몸을 돌려 바닥에 안전하게 발을 디뎠다.

“어…어떻게 이…이런 일이?”

켈리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똑같은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는 오른손을 다시 들어올렸다. 하지만 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지니의 옷에 붙은 실오라기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어…어떻게 이…이런 일이?”

얼굴빛이 발연히 변하기는 리즈와 안드레이, 노박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초조한 빛이 역력해진 켈리와의 차이점은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실넘실 어렸다는 사실이었다.

“지니!”

상황의 변화를 가장 좋아한 사람은 역시 리즈였다. 그는 곧바로 지니에게 달려가 그를 꼭 껴안았다. 리즈의 얼굴에는 눈물이 펑펑 흘렀다.

“이대로 네가 죽는 줄 알았어.”

지니는 리즈의 뒤통수를 탁 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쉽게 간다니? 리즈! 내가 누구니? 슐티쇼바 거리의 지니야! 지니!”

지니는 켈리 따위는 이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리즈와 웃으며 잡담을 나눴다.

둘의 모습을 보면서 켈리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소름끼치도록 눈을 빤득거리며 두 손을 모아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그의 손끝에서 다시 시뻘건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앞으로 퍼져 나오더니 이전처럼 이상한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연기가 변하는 사이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아예 반쪽으로 갈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중에는 동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연기는 괴상한 동물로 변했다. 온 몸이 털로 뒤덮였고 코끼리 상아 같은 이빨이 눈에 뛰는 괴물이었다.

크허헝!

괴물은 괴성을 지르면서 앞의 두 발로 땅을 쿵쿵 굴렸다. 흐베즈다 언덕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굴론!”

연기를 바라보던 지니의 입에서 리즈와 다른 모든 이에게는 낯선 이름이 튀어나왔다. 리즈는 놀란 나머지 지니 등 뒤로 숨어버렸다.

“리즈, 저쪽으로 멀리 떨어져. 저 괴물은 상당히 무서운 놈이야.”

리즈는 두려운 기색으로 괴물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슬금슬금 옆걸음질을 쳤다.

크허헝!

쿵쿵!

굴론은 다시 괴성을 지르고 땅을 구르더니 지니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지니는 팔찌에 입을 맞추면서 다시 주문을 외웠다.

“오헤니 미루!”

주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팔찌에서 엄청난 빛이 터져 나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처럼 날카롭기도 했고, 끝이 끊어진 굵은 전선에서 흘러나오는 고압의 전류처럼 매섭기도 했다.

“성 루드밀라의 채찍!”

다른 유령관리인들과 함께 여름별궁 담장 안에 숨어 있던 노박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야로미르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더 이상 못 볼 줄 알았는데….”

하지만 팔찌를 이용하는 주문을 알아냈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빛 채찍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날뛰었다. 수도꼭지를 완전히 트는 바람에 긴 고무호스가 사방팔방으로 물을 뿌리며 날려 다니는 것 같았다.

지니는 간신히 주문을 알아냈을 뿐 채찍을 제어할 기술이나 힘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어린 탓에 몸무게도 얼마 나가지 않고 팔다리도 굵지 않은 그는 채찍이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닐 뿐이었다.

크흐헝!

상황은 지니에게 달려들던 굴론도 마찬가지였다. 기겁할 정도로 무서운 빛 채찍이 피를 보고 흥분한 투우장의 소처럼 날뛰는 걸 보고 괴물은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니 등 뒤로 접근했다가도 채찍이 허리를 잘라버릴 것처럼 날아오는 걸 보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곤 했다. 물론 지니가 의도적으로 굴론의 허리를 노린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통제할 수 있지?

지니는 두 다리에 힘을 한껏 주고 두 손을 꼭 붙잡았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채찍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으아악!”

갑자기 채찍이 땅을 힘껏 때리는 바람에 지니는 허공에 붕 떠서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쿵!

“아흐!”

지니는 비명을 지르면서 여름별궁을 에워싼 숲의 맨 앞에 서 있는 키 큰 나무 앞에 떨어졌다. 그가 추락하는 바람에 빛 채찍은 사라져버렸다.

야옹!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반점이 박힌 고양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갑자기 나타난 소녀를 노려보았다.

지니는 힘겹게 허리를 일으키며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안해. 네가 숨어있는 줄 몰랐어.”

야옹!

고양이는 지니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다시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더니 손등을 핥았다. 유령과 싸우느라 고생이 많다면서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니는 고양이 얼굴을 빼꼼히 쳐다봤다. 고양이도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지니는 그 모습에서 호우스카 성의 고양이를 떠올렸다.

“바셋!”

지니는 눈을 껌뻑거리며 다시 고양이를 주시했다. 바셋은 아니었다. 털 색깔과 얼굴 모양이  확연히 달랐다. 그의 표정이 변하는 걸 확인한 길고양이는 몸을 돌려 어두운 숲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니는 숲속으로 돌아간 길고양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바셋이 한 말을 떠올렸다. 중간세계에서 빛 채찍 훈련을 시작할 때 했던 말이었다.

‘네가 나와 마음이 통해서 대화를 주고받듯이 채찍과도 마음을 일치시키는 게 중요해.’

지니는 고양이와 함께 중간세계에 처음 내려갔을 때 노란색 빛을 확산시키던 순간을 생각해 보았다.

‘마음으로!’

지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름별궁 앞으로 걸어갔다. 켈리와 굴론은 물론 안드레이, 노박, 리즈가 그의 걸음을 유심히 지켜봤다.

켈리와 굴론은 감히 지니에게 다가서거나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빛 채찍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것은 직접 확인했지만 함부로 달려들다가는 엉뚱한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드레이는 야로미르가 살아 있을 때 빛 채찍을 사용하던 모습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는 마치 채찍과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았지. 고무줄놀이를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줄넘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 어떤 때는 바람처럼 흐늘거렸고, 어떤 때는 강물처럼 거칠게 몰아쳤어.’

안드레이는 힘겹게 허리를 들고 소리를 질렀다.

“지니! 채찍을 통제하려고 애쓰지 말거라. 채찍이 장난기 넘치는 어린이나 고양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놀이를 즐기렴.”

지니는 안드레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셋이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였다.

지니는 두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그는 클라슈테르니 테라소바 정원에서 걷고 있었다. 리즈와 쿨은 긴 줄 두 개를 잡고 환하게 웃으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고양이 얀과 파벨이 리즈의 강아지 주니와 함께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리즈와 쿨은 긴 줄 두 개를 서로 엇갈리게 크게 돌렸다. 지니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줄에 몸이 걸리지 않게 재빨리 다리를 놀렸다. 줄의 속도가 떨어지면 다리를 움직이는 속도도 낮췄다. 지니는 이번에는 얀, 파벨과 함께 놀이를 즐겼다. 긴 나무 작대기에 생선 모양 장난감을 달아 이리저리 흔들었다. 두 고양이는 마치 춤을 추듯이 이리 폴짝, 저리 폴짝 뛰며 발톱으로 장난감을 낚아채려고 애를 썼다.

지니는 눈을 감은 채 팔찌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오헤니 미루!”

팔찌에서 다시 무서운 빛 채찍이 튀어 나오더니 역시나 이리저리 날뛰었다. 지니는 이번에는 그냥 버티지 않았다. 채찍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팔을 흔들거나 걸음을 옮기면서 리듬을 맞추었다.

‘무작정 따라다니면 안 돼.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흐름을 타야 해.’

지니는 리즈, 쿨과 함께 줄넘기를 할 때와 학교에서 배운 탭 댄스의 스텝을 생각했다. 고양이 얀, 파벨과 놀이를 할 때 팔다리의 움직임도 떠올렸다. 그리고 채찍의 흐름을 그 스텝, 움직임과 비교해 보았다.

‘똑같지는 않지만 양쪽 모두에게는 리듬이란 게 있구나. 그걸 찾아야 해. 내가 리듬을 주도해야 해.’

지니는 문득 채찍이 날뛰는 게 엄마에게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걸 달래지 못해 비지땀을 흘리며 전전긍긍하는 엄마였다.

‘그렇다면…! 노래! 자장가를 불러야 하겠어.’

지니는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 ‘스피 야니츠쿠 스피’를 약간 빠르고 신나게 부르기 시작했다.

“잘 자라 야니첵 잘 자거라

사과 세 개를 선물로 줄 거야

첫 사과는 빨간색 두 번째는 초록색

잘 자라 야니첵 잘 자거라

작은 눈을 꼭 감고 잘 자거라


잘 자라 야니첵 잘 자거라

사과 세 개를 선물로 줄 거야

하나는 빨간색 둘째는 초록색

마지막 사과는 파란 하늘색

잘 자라 야니첵 사랑하는 내 아기.”

지니는 자장가 리듬에 맞춰 팔찌가 감긴 손을 흔들었다. 천방지축 날뛰던 채찍은 노래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설치는 건 여전했지만 지니의 손짓, 몸짓과 혼연일체가 돼 제법 질서를 갖게 됐다.

지니는 팔찌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춤을 추던 채찍은 팔찌 안으로 쑥 들어가 사라졌다. 그는 아주 흡족한 웃음을 띠며 얼굴에 묻은 먼지와 풀잎을 떨어냈다.

지니는 조금 전과는 달리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켈리와 굴론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공포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신나는 놀이를 앞두고 즐거워하는 소녀의 표정 그대로였다.

지니가 채찍을 다루는 모습을 본 켈리는 소름끼치도록 눈을 빤뜩거렸다.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더듬거렸다.

“구…굴론, 저…저저…꼬마를 박…박살내버려.”

굴론은 땅을 쿵쿵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코에서는 하얀 김이 솟아올랐다. 그는 두 발로 다시 땅을 크게 두들긴 다음 곧바로 상아 같은 이빨을 아래로 약간 숙이고 지니를 향해 달려갔다.

크허헝!

두두두!

괴물이 무섭게 달려왔지만 지니는 편안하고 침착하게 계속 걸어갔다. 그는 속으로 굴론과의 거리를 재어보았다.

‘10m 앞까지 다가오면 결판을 내야겠어.’

지니의 속셈을 알 길이 없는 굴론은 한 번에 모든 걸 끝내겠다는 듯 그대로 질주를 계속했다. 유령위원회가 어두운 여름별장 앞의 공터에 설치한 조명의 빛 사이로 굴론이 일으킨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하나, 둘 셋!’

지니는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그는 마지막 숫자 셋을 헤아림과 동시에 팔찌를 쓰다듬으면서 큰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오헤니 미루!”

지니의 팔찌에서 엄청난 굵기의 빛 채찍이 돌개바람 모양처럼 튀어 나왔다. 채찍 중에서 지니의 손목에 가까운 부분은 그렇게 굵지 않았다. 채찍은 손목에서 3~4m 정도 떨어진 부분부터 둘둘 말려 있었다. 마치 알록달록한 사탕 롤리 팝이 지니의 손목에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지니는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몸으로 리듬을 느꼈다.

“잘 자라 야니첵 잘 자거라

사과 세 개를 선물로 줄 거야.”

채찍은 춤을 추듯 노래에 맞춰 흔들거렸다.

굴론은 무작정 달려 채찍 3~4m 앞까지 달려왔다.

“지니야! 조심해. 위험해!”

리즈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안드레이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라! 평화의 빛이여! 사악한 어둠을 몰아내버려라.”

지니는 눈앞에까지 다가온 굴론을 끝까지 노려보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파지직!

지니가 고함을 지르자 사탕처럼 둘둘 말려 있던 채찍은 돌변했다. 흐베즈다 언덕에 처음 나타나 지니를 골탕 먹일 때처럼 번쩍거리는 번개처럼 요동쳤다. 채찍은 파지직 소리를 내면서 전기 불꽃을 발산하더니 순식간에 굴론의 허리를 휘감아버렸다. 졸지에 괴물은 롤리팝 사탕에 갇힌 신세가 돼 버렸다.

채찍이 요동치면서 일으킨 파동은 팔찌를 거쳐 지니의 손목으로 전달됐다. 지니는 파동을 느끼면서 놀이용 줄을 힘껏 돌리듯 팔을 크게 흔들었다. 즐거운 춤을 추는 것처럼 다리도 현란하게 움직였다. 채찍의 충격 때문에 흔들리는 게 아니라 채찍의 리듬에 맞춰 줄넘기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파지직!

다시 한 번 채찍에서 커다란 굉음과 함께 눈부신 전기 불꽃이 일었다.

펑!

크와앙!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이어 아주 고통스럽고 끔찍한 비명이 뒤를 따랐다. 채찍에 둘둘 감긴 굴론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부서진 몸통 중에서 일부는 허공으로 날아가다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사라지듯 그냥 없어져 버렸다. 땅에 떨어진 조각도 마찬가지였다. 코끼리만 한 덩치를 자랑하던 괴물은 불과 1~2초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굴론을 처리한 지니는 켈리를 노려보았다.

켈리는 두려움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불그스레하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고 손은 술을 마시지 못한 알코올중독자처럼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겁먹을 것 없어. 저 아이는 그냥 꼬마일 뿐이야. 아직 팔찌 활용법을 제대로 몰라. 방금 그건 재수가 좋아서 그런 거야. 기습공격을 감행하면 이길 수 있어.’

켈리는 눈치를 살피다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정신을 집중해 온 힘을 다 모아 돌가루에서 얻은 강력한 기운을 흘려보냈다. 그의 손에서 불그스레한 빛이 강하게 흘러나왔다. 나중에는 전압이 엄청나게 높은 전기가 새는 것처럼 불꽃을 튀겼다. 켈리의 손에서 나온 기운은 지니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지니는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팔찌를 쓰다듬었다. 노란색 빛이 흘러나와 주변을 에워쌌다. 켈리의 기운은 노란빛을 뚫지 못하고 옆으로 흩어졌다.

“에잇!”

켈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를 앙다물고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의 기운은 더 강력해졌고 빛은 더 붉어졌다. 하지만 켈리의 기운은 여전히 지니의 노란빛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계속해서 옆으로 흘러나갈 뿐이었다.

켈리는 온갖 표정을 다 지어가며 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기운을 더 강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래도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지니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두 뺨을 탁탁 쳤다.

“이제 내 차례야!”

지니는 다시 팔찌를 쓰다듬으면서 큰소리로 주문을 외쳤다.

“오헤니 미루!”

팔찌에서 눈부신 빛줄기가 앞으로 뻗어나갔다. 오랫동안 굶주렸다가 발견한 먹이를 낚아채려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사자 같은 기세였다.

지니는 노래를 부르면서 학교에서 배운 탭댄스를 추며 발을 움직였다. 그가 부른 노래는 체코 민요인 스토돌라 품파였다.

“스토돌라 스토돌라 스토돌라 품파 스토돌라 품파 스토돌라 품파

스토돌라 스토돌라 스토돌라 품파 스토돌라 품파 품 품 품.”

지니의 노래에 따라 빛 채찍도 춤을 췄다. 그냥 일직선으로 켈리를 향해 날아간 게 아니라 발을 구르듯 땅을 튀기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유령을 공격하려는 것보다는 같이 놀 친구에게 다가가는 모습이었다.

“도…도대체 저…게 뭐야? 뭐…뭘 하자는 거지?

켈리의 얼굴에는 당황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빛 채찍에 어떻게 맞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유령위원장의 무기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켈리가 주저하는 사이 빛 채찍은 그의 주변을 갈고리 모양으로 둥글게 에워쌌다. 골룬을 공격한 모양이 돌개바람 모양 사탕이었다면 이번에는 물음표였다. 빛 채찍은 지니의 노래 리듬에 맞춰 켈리 주변의 땅을 들쑤셨다.

켈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아날 길은 그곳뿐이었다. 그는 빛 채찍이 달려들 틈을 주지 않고 위로 날아올랐다.

파지직!

빛 채찍의 끝부분이 켈리를 따라 올라가더니 오른쪽 발목을 힘껏 붙잡았다. 그리고 스토돌라 품파 리듬에 맞춰 그를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었다.

“스토돌라 품 품 품!”

지니는 후렴을 마지막으로 노래를 마무리지었다. 빛 채찍은 품 품 품이라는 마지막 가사에 맞춰 켈리를 위 아래로 두 번 흔들더니 마지막 ‘품’이라는 부분에서는 땅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쿵!

켈리가 땅에 떨어진 곳에서 폭풍 같은 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근처에 서 있던 작은 나무 하나는 뿌리째 뽑혀 날아가 버렸다. 큰 충격을 받아 졸도한 듯 켈리는 일어나지 못했다.

켈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본 노박은 여름별장 담벼락 안쪽에 숨은 한 유령관리인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수송차에서 체포 드론을 꺼내 날려!”

잔뜩 겁을 먹고 몸을 수그리고 있던 유령관리인은 노박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려 여름별장 한쪽에 세워진 수송차로 달려갔다. 그는 짐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드론을 꺼냈다. 지름이 1m를 넘는 초대형이었다. 유령관리인은 두 손으로 무선 컨트롤러를 조작해 드론을 켈리 머리 위쪽으로 날렸다.

노박은 이번에는 지니를 향해 두 손을 나팔처럼 모았다.

“그놈이 달아나지 못하게 해.”

지니는 노박의 계획을 금세 이해했다. 드론에서 빛을 발산해 켈리를 가두려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팔찌를 쓰다듬고 주문을 외웠다. 이번에는 ‘스피 야니츠쿠 스피’를 즐거운 리듬으로 불렀다. 팔찌에서 튀어나온 빛 채찍은 넘어진 켈리의 온 몸을 휘어 감고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너울거렸다.

“체포 공을 발사해.”

노박은 켈리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걸 확인하고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드론 아랫부분이 열리더니 붉은색 공 하나가 내려왔다.

“체포 단추를 눌러.”

유령관리인은 무선 컨트롤러의 빨간 단추를 눌렀다. 공에서 빨간 빛이 새어나와 켈리의 몸을 덮었다.

휘이잉!

공은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빛 속에 들어온 모든 물체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먼지와 마른 풀잎이 공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정신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켈리는 반항하지도 못하고 다른 찌꺼기들과 함께 그곳으로 빨려들었다. 그가 안에 들어가자 공에서 나오는 빨간 빛은 사라졌다. 공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유령관리인은 수송차에서 은색 알루미늄 상자를 꺼내 공을 넣었다.

“됐어! 하하!”

노박은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 상체만 겨우 일으킨 안드레이도 그제야 환한 웃음을 지었다.

지니는 두 사람의 모습을 곁눈질하면서 팔찌를 쓰다듬었다. 빛 채찍은 팔찌 안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얼굴이 벌게진 리즈는 지니에게 달려가 포옹했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네가 큰일이라도 당할까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아니?”

리즈가 얼마가 힘껏 껴안았는지 지니는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그는 리즈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너 때문에 내 가슴이 더 조인다. 이제 그만 풀어줘.”

지니는 안드레이에게 다가갔다.

“많이 다치신 건가요?”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진 것 같아. 죽을 정도는 아니야.”

여름별장 안이나 숲 속에 숨어 지니와 켈리의 대결을 지켜보던 유령관리인들이 하나둘씩 여름별장으로 모였다. 그들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박은 켈리를 가둔 알루미늄 상자를 수송차에 싣고 서둘러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켈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니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수송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드레이는 힘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카를교의 성 네포무츠키 동상 아래 교각 아래에 있는 지하감옥에 갇히는 거야.”

“카를교 아래에 감옥이 있다고요?”

“너무 위험해서 어디에도 풀어놓을 수 없는 유령을 가둬두는 곳이지.”

리즈는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 궁금해졌다. 잘못을 저지른 죄수를 수감하는 교도소와 비슷한 공간일까? 많은 귀신을 본 김에 그곳도 둘러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가 볼 기회가 있을 거야.”

안드레이는 리즈의 생각을 눈치 챈 듯 빙긋이 웃었다.

“감옥 외에 두 번째는 뭔가요?”

“중간세계 너머에 말썽을 피운 유령을 보내는 끔찍한 공간이 따로 있지.”

“다른 공간? 그곳이 어딘가요?”

안드레이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졌다.

“그곳이 어딘지, 어떤 곳인지 우리도 정확하게 몰라. 그래서 이름도 못 붙였어. 그냥 중간세계 너머의 세계라고만 불러. 그곳에 갇힌 유령은 100년에 한 번 딱 하루 중간세계로 나올 수 있는 휴가를 얻어.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중간세계의 다른 유령이 전해준 게 우리가 아는 전부야.”

지니는 중간세계의 황폐한 풍경을 생각해보았다. 그곳보다 더 무시무시한 곳이라면 어떤 곳인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안드레이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들은 그곳의 풍경은 이런 거야. 배를 타고 가다 난파했다고 생각해보렴.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은 거야. 손바닥만 한 암초에 겨우 발을 올려 목숨만 건졌어. 암초는 너무 작아서 앉을 수도 없어. 주변에는 온통 물 뿐이지. 발을 내디딜 수도 없어. 하늘에는 별 하나 없이 깜깜해. 게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파도 소리까지 사라져버렸어. 바람도 불지 않아.

바늘처럼 뾰족한 작은 암초에 맨발로 서 있어야 하니 얼마나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겠니? 그게 전부가 아니야. 더 끔찍한 다른 고통도 있어. 살을 에는 한겨울에 차가운 얼음으로 뼈를 문지르는 것 같은 냉혹한 기분이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거야. 바로 외로움이란 녀석이지. 이놈은 하루 종일 혈관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며 온 몸을 오싹하게 만들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이놈은 하루 종일 몸을 핥는 거야.

외로움이 잠시 진정됐다 싶을 때에는 독수리가 곧 심장을 파먹을 것 같은 몸서리쳐지는 공포가 온 몸을 사로잡아. 분명히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누군가 살점을 한 점 한 점 뜯어내려고 피비린내 나는 날카로운 흉기를 코앞으로 조금씩 들이민다는 생각이 머리를 장악해버린 거야. 그 흉기가 칼인지, 송곳인지, 창인지 알 수 없어. 보이지 않으니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더 무섭고 두려운 거지.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무서워할 것 없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소용이 없어. 공포는 절대 사라지지 않아. 중간세계 너머 세계는 그런 곳이야.”

지니와 리즈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그렇게 참혹한 곳이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이 온 몸을 핥는 것처럼 으스스해졌다.

“켈리는 그런 곳에서 영원히 머물러야 할지도 몰라.”

유령위원회 요원들은 노박의 지시에 따라 장비를 철거했다. 자정이 넘어 피곤할 만도 했지만 아무런 피해 없이 켈리를 붙잡아 무사히 일을 마무리한 덕인지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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