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우연히 들른 도산서원,
이렇게 거룩하고 숭고하게 다가온 날은 없었다.
내일 퇴계 선생의 혼령이서당 툇마루 햇살로 내려앉아
후손들의 곁에 오래 머물다 가시기를 빌어본다.
들어가는 길은 한산했지만, 주말 행사라도 있을 예정인지 서원 앞 마당 한가운데 간이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 의자들이 빽빽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오늘이 퇴계 선생 귀향길 450주년 재현 걷기 행사의 마지막 날일까?’
퇴계 선생은 드디어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그 귀향길을 따라 현재의 유림이 도포 차림으로 서울에서 출발해 도산서원에 당도한다는 행사가 열린다는 신문 기사를 접한 즈음이었다. 긴가민가하고 되돌아 나오던 길 앞쪽에서 도포 자락 휘날리는 한 무리의 유림을 발견했다. 나는 몇 분의 어르신을 급하게 뒤따라가 다짜고짜 여쭈었다.
“어르신, 혹시 퇴계 선생 귀향길 도보단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 그러면 오늘 모두 도산서원에 도착하는 마지막 날입니까? 함께 출발하신 분들은 뒤에 오십니까? 모두 무탈하십니까?”
“예, 모두 무탈합니다. 하지만 행사는 내일이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는 선발대라서 오늘 도착했습니다만.”
“아…. 서원 앞 마당에 무대와 의자들이 준비되어 있어서 오늘 도보단 전원이 도착하는 줄 알았습니다.”
“내일 행사 마지막 날이니 미리 준비해놓은 것이죠.”
내일 도착한다니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소식을 더 듣고 싶어 바짝 따라붙었어.
“선비님, 하루에 도보 거리가 꽤 되었지요?”
“평균 20km 정도 걸었으니 옛날로 치면 50리쯤 되겠지요. 어떤 날은 더 걷기도 했습니다.”
“숙소는 한옥이었겠지요?”
“그런 곳도 있었지만, 모텔에서도 묵었답니다.”
“예? 모, 모텔에서요? 선비님들이 그런 곳에 주무시다니….”
“하하하, 그렇게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8시에 출발해야 해서 좋은 숙소를 고집할 수 없었습니다. 그 옛날, 퇴계 선생이야말로 호사스러운 집에 유숙했을 리 없지 않겠습니까.”
말씀하시던 어르신이 갑자기 도포 자락을 훌쩍 들어 안에 입은 옷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우리는 도포 안에 이렇게 편한 옷과 좋은 운동화를 신고 걸어왔습니다. 그래도 발에 물집이 잡히고 인대가 늘어난 분들이 많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퇴계 선생은 어떠했겠습니까. 옷차림도 몸도 불편한 상태로…. 그저 선생께 송구할 따름이지요.”
어르신이 그만 가봐야겠다 하신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서서 공손히 인사하며 예를 표했다. 멀어져 가는 분들은 어느새 허리를 곧추세우고 서원 앞마당 쪽으로 척척 걸어가고 계셨다. 그 모습은 청량산에서 솟아 나온 샘물이 도저한 물결의 낙동강이 되기 위하여 저 토계천(土溪川)으로 결연히 흘러내리다가 시사단(試士壇)을 감싸고 도는 부드러운 물결처럼 퇴계 선생의 자애로운 미소와 닮아 있었다.
선비님의 도포 자락 속 편안한 일상복을 생각하면 살풋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그 13일간 320여km를 걸어 퇴계 선생의 정신을 되새기었을 도보단의 걸음을 생각하면 가슴 벅차올랐다. 그들의 정성은 하늘과 땅과 토계천이 가히 알아주리라.
우연히 들른 도산서원, 너무나 익숙해진 이 도산서원이 이렇게 거룩하고 숭고하게 다가온 날은 없었다. 돌아 나오며 내일 행사 마지막 날 퇴계 선생의 혼령이 서당 툇마루 햇살로 내려앉아 후손들의 곁에 오래 머물다 가시기를 빌어본다.
우리는 도포 안에 이렇게 편한 옷과 좋은 운동화를 신고 걸어왔습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인대가 늘어난 분들이 많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퇴계 선생은 어떠했겠습니까.
옷차림도 몸도 불편한 상태로….
그저 선생께 송구할 따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