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사육신의 절개를 꼭 닮은 배롱나무들이 이 묘골에 가득 피어 있는 여름날,
게다가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감싸고 돌아가니
어떤 잡귀가 육신사의 담을 타고 들어올 수 있으랴.
연초부터 시작된 바이러스 대란. 실내 공간에서의 생활은 물론이고 야외활동도 자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행이란 너무나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났던 10여 년 전의 그들을 이제 만나러 간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터이다.
묘골 진입로에 들어가자 배롱나무들이 길을 활짝 열어주며 예를 표해주었다. 그랬다. 나는 참으로 배롱나무들의 아리따우면서도 거룩한 몸짓을 사모한다. 사당이나 절간의 작은 연못 같은 곳에서 고집스러운 충직함을 느낄 때마다 온몸 전율하게 된다. 내가 처음으로 배롱나무의 위엄을 보게 된 곳이 바로 이 육신사 진입로였다. 작고 어린 꽃잎들이 조롱조롱 달려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 넘겼던 분홍의 꽃잎들이 절개를 지킨 이들을 호위하고 있던 그 뙤약볕의 여름날. 그들의 용맹정진하는 잎들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관광객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문화해설사 선생님께 해설을 부탁하니 비 오는 와중에서도 반갑게 달려와 주신다.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선비들이 역적으로 몰려 세조에게 죽임을 당할 때 그 가문의 맥을 끊고자 삼족을 멸하라는 어명에 따라 관련된 집안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육신사를 지어 제향 올리는 박팽년의 후손만이 살아 있는 것인가? 박팽년의 자부가 태중에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그 집 노비가 자신의 아이와 바꿔치기해 박씨 집안의 아들을 거두어 줌으로써 대를 이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려주신다. 그의 자손이 신분 복원이 될 때까지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극적이다.
박팽년의 현손이었던 박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죽은 선비들의 원혼이 집 밖에서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중에서 그분들도 함께 제사를 지내주게 되어 이 ‘육신사’의 사당에서 여섯 분의 제사를 지내주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만큼 ‘충절(忠節)’이란 위대한 덕목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은 이들은 살아생전에 그랬던 대로 죽어서도 불의한 자들에게 고개 숙이는 법이 없다는 이야기를 그렇게라도 꾸려갔다는 것은 깊이 새겨볼 만하다.
이러한 곳에 호위무사로써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있는 육신사 뜰앞의 배롱나무들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깡마른 몸으로도 단단하고 늠름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침묵 속에 서 있다. 이 육신사 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당 앞을 지키는 배롱나무들이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한여름날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도 이들은 결코 고개 숙이는 법이 없다. 뜨거움이 지나칠지라도 나뭇가지에서 말라 비틀어 죽을지언정 쉬이 꽃잎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사육신의 절개를 꼭 닮은 배롱나무들이 이 묘골에 가득 피어 있는 여름날, 게다가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감싸고 돌아가니 어떤 잡귀가 육신사의 담을 타고 들어올 수 있으랴.
사당 옆쪽으로 아름다운 조선 전기의 건축물 ‘태고정(太古停)’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보물로 지정된 것은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이다. 현판‘태고정’*의 글씨는 유명한 서예가 한석봉의 것이라 한다. 현판 ‘일시루(一是樓)’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라고 전하는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낙관 글씨가 있다. 글씨가 워낙 마모되어 정확하게 읽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이 아호는 재주가 많거나 총명한 자식에게 화가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아버지 문종이 일부러 비천한 뜻의 호를 지어 주었다 한다. 민가에서도 잘나고 예쁜 아가는 호환·마마*가 빨리 데리고 간다고 해서 ‘못난이’,‘못냄이’ 등으로 불렀다고 하니 과연 사람 사는 곳의 일은 다 똑같으며 부모의 마음 또한 같은 것인가 보다.
‘비해당’이라고 하는 이 집은 1479년에 박일산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안평대군의 현판이 이 집에 걸린 것은 무슨 연유일까? 1453년 수양대군이(훗날 세조) 계유정난을 일으킨 후 둘째 형이었던 안평대군을 사사(賜死)시켰다는 점을 보아 이 건물을 짓기 이전에 쓴 글씨라는 설(說)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건축물에 관해 아는 바는 없지만 이렇게 문화재를 찾아다니는 여행이 큰 공부의 장(場)이 되는가 보다.
되돌아 나오는 육신사 골목에서 다소곳한 집‘도곡재(陶谷齋)’를 만난다. 이곳은 조선시대 남부지방 양반 가옥의 실례를 잘 보여준다고 하여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소박한 문을 들어서니 바로 문 옆에 자리한 조그만 연못의 고고함이 예사롭지 않다. 어찌 이리도 정갈하고 아름다운 연못이 있으랴. 사람의 손이 간 흔적은 있었지만, 결코 인위적인 구성을 하고 있지 않은 조그만 새로운 세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면서도 어느 풀 하나 소외됨 없이 주변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언젠가 종묘에 갔을 때 만났던 연못 안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자태의 정갈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숭고함을 느끼게 했다. 창덕궁의 부용지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조선의 격식과 위엄을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연못의 화려함. 그런 궁궐의 연못만을 보아오다가 이처럼 소박한 연못을 만나본 건 처음이다.
순박한 아름다움이 주는 소소한 감동이 온몸으로 전해져 그 연못 주변을 몇 번이나 돌았는지 모르겠다. 없는 듯하면서 세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철학을 담아 놓았을 조그만 연못에 조상들의 지혜가 숨어 있을 것이나 그것을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이 부족하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름이 없으니 그저 ‘도곡지’라 불러볼 만할까? 아쉬움 뒤로 하고 묘골을 등지고 나간다. 아직 남아있는 묘골의 배롱나무꽃들은 찬 바람 불어 낙화(洛花)할 때까지 오가는 이 앞을 초롱초롱 밝혀 줄 것이다.
이 연못 끝에 서서 정자를 바라보니
비가 추적추적 오고 이미 연꽃은 떨어져쇠락해가는 왕조의 슬픔처럼
연꽃잎들의 부스럭거리는 건조한 침묵이 비를 타고 흐른다.
묘골을 나서 잠시 꼬부라진 길 따라가니‘달성 삼가헌 고택’이 나온다. 아직 사람들이 기거하는 곳이라 조심스럽게 들어가야 한다. 삼가헌 고택은 박팽년 후손이 지은 건물이고 조선 후기 영남 내륙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인정되어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담벼락 옆으로 탱자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탱자나무들이 어깨동무하며 담벼락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벌써 열매도 맺어서 제법 큰 알맹이를 달고 있으니 저 탱자 열매 누렇게 익으면 얼마나 아플 것인가 요즘 자라는 아이들은 알기나 할까 모르겠다며 혼자 빙긋 웃는다.
조심스레 문안을 들여다보니 주거하고 계시는 종가댁의 어른이 한 분 걸어 나오신다. 구경하고 가도 되겠냐 여쭈니 그렇게 하라신다. 휴, 다행이다. 코로나 때문에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는 것 아닌가 했더니 오늘 운이 좋구나. 고택이라면 역시 현판이나 편액이 볼만 할 텐데, 혹시 현판 설명이라도 해 주시려나 하고 어르신을 쳐다보니 애써 눈길을 피하며 방으로 들어가신다. 기거하고 계신 분들은 관광객들의 무례를 견디며 불편을 감수하셔야 하니 때론 무심하실 수밖에 없나 보다.
마당 한쪽으로 나 있는 나무 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 별천지가 있다. ‘하엽정(荷葉亭)’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옛적에는 서당을 했다고 한다. 그 앞에 연못이‘연지(蓮池)’. 고택의 뜰에 이러한 연못이 있으리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 허술해 보이는 고택에 어찌 이토록 아름다운 연못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다물지 못해 감탄만 연발한다. 이 연못 끝에 서서 정자를 바라보니 비가 추적추적 오고 이미 연꽃은 떨어져 쇠락해가는 왕조의 슬픔처럼 연꽃잎들의 부스럭거리는 건조한 침묵이 비를 타고 흐른다. 한창 피었을 연꽃의 눈부심을 사람들은 어찌 감당해 냈을까. 그 모습을 렌즈에 담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 들렀을까. 그저 자연의 하는 일이언마는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은 어떻게든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대는 인간들의 생태가 뭇 생명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활짝 핀 연꽃을 보지 못해서 좋았다.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는 연꽃들과 이미 고개 꺾어져 버린 연의 가지들이 다가올 죽음을 통해 다음 삶을 예견하는 희망처럼 보이니 이 연못을 통해 청춘과 늙음과 죽음마저 하나임을 다시 느끼게 된다.
물굽이 흐르는 정자에서 늦가을 철새들이 날아들어 쉬어가던
그 아름다웠던 낙동강의 옛 모습을 다시 만난 듯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던 주인장의 따뜻한 배려가 내내 가슴에 남아있다.
오늘은 연못 구경을 눈 시리게 하는구나 하고 다시 길 나선다. ‘달성 하목정(霞鶩亭)’은 2019년에 대한민국 보물로 승격한 곳이다. 사가(私家)의 누각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니 어떤 연유일까. 들어가는 입구의 방에 한 분이 앉아 공부하고 계시기에 조심스럽게 묻는다.
“여기 하목정에 관해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상치 못한 답이 방에서 흘러나온다.
“피곤해서 그런 거 안 하고 싶습니다.”
섭섭한 마음이지만 할 수 없는 일 아니겠나. 관광객들이 한둘 아니었을 터이니 이 댁에서도 사람들 맞는 일이 그저 반가울 수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이곳은 배롱나무 아래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더욱더 사람 소리가 잡음처럼 들릴 수 있을 것이다.
뒤쪽 사당에 올라가니 수령 400년이 넘은 배롱나무들이 의연하게 낙동강을 바라보고 섰다. 얼마 전 다녀왔던 산청의 ‘이사재*’에 있었던 유명한 배롱나무는 고적한 세월을 외로움으로 그저 함구하고 있었더랬는데 이 배롱나무들은 낙동강 물결에 장단 맞춰 한풀이해 가며 화통하게 살았던 듯 재기(才器)의 발랄함이 있다.
하, 4백 년이나 땅에 뿌리박고 살아 계셨으니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렷다!
자고로 지혜로운 분께는 예를 갖추어야지 하고서 머리 숙여 인사 꾸벅하고 돌아 나온다.
되돌아가기 아쉬워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방안에 앉아서 책 읽던 노인이 이쪽으로 오신다. 흰 머리를 뒤로 묶으시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까 그래 놓고 나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대청마루에 오르라 하신다.
“문화재인데 마루에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니
“아, 내가 이 집 주인인데 내 허락받으면 되지요.” 하신다.
요건 아까 사당 마당에서 인사 올린 배롱나무 어르신의 선물이 틀림없구나 하고 냉큼 신발 벗고 마룻바닥으로 올라선다. 이 집 종손 어르신이라 하는데 어머니께서 백수 하시고 돌아가시고 난 뒤 이 집을 지키고 계신다는 인사말과 함께 하목정의 유래와 인조 임금과 어떻게 인연이 되었는지, 그리고 곳곳에 붙어 있는 한시들을 일일이 대나무막대기를 짚어가며 풀어 해석해주시면서 설명해 주신다.
“옛날엔 한양가는 선비들이 낙동강을 따라가던 길에 우리 집이 훤히 보여 다들 이곳에서 묵고 가기를 청하곤 했다오. 하목정은 중국 시에서 따 온 이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지요. 놀하(霞), 집오리 목(鶩)이니 한 번 풀어 보시오. 오리들이 저 너른 낙동강에 가에서 놀고 있는 그 풍경을 보고 짓게 된 이름이란걸 알겠지요? 지금은 이 앞에 고속도로가 생겨 소음도 심하고 그전만큼의 가치는 상실됐지만 그래도 이 건물이 얼마나 잘 만들어진 것인데 싶어서 문화재 신청했더니만 결국 작년에 승인이 났어요. 그래, 선생님 성은 무어요?”
어쩌다 나는 이렇게 말해 버렸다.
“공…. 곡부 공….”
“아하, 공 선생. 공자님 후예가 오셨구먼요. 반갑소이다.”
친정어머니 성씨가 ‘공부 공(孔)’이다. 늘 공자의 후예에 대한 자부심을 지닌 나였지만 뜻밖에도 외가의 성씨를 말해 버리다니….
‘친가는 김해 김(金)이요 외가는 곡부 공(孔)입니다.’
하고 말해야 할 것을 친가 이야기 뚝 떼버리고 바로 외가 성씨부터 나왔으니 어쩌나. 수습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듯해서 아무 말 못 했는데 어르신은 계속 나에게 “공 선생, 공 선생”하시는데 어째 그 말이 듣기 싫지 않았다.
“공 선생” 부르고는 뒷문 쪽을 가리키며 “어찌나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지 건물 뒤쪽 받침대가 내려앉아서 이 대청마루에 출입 금지 시켰지요. 배롱나무꽃이 한창일 때는 사람들이 해도 해도 너무 많이 와요. 하루에 2~3백 명 와서 저 나무 아래 탁자 아래 앉아서 줄을 서서 사진을 찍어요. 사진 찍는 것도 좋지만 공 선생처럼 옛이야기도 좀 알고 건축물의 아름다움도 좀 느끼고 갔으면 좋겠구먼….”
물굽이 흐르는 정자에서 늦가을 철새들이 날아들어 쉬어가던 그 아름다웠던 낙동강의 옛 모습을 다시 만난 듯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던 주인장의 따뜻한 배려가 내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이번에 달성에게 큰 선물을 받았다.
어떤 궁전보다 아름다운 고택의 뜰이라는 몇 폭의 그림들.
그 속에 들어가 살포시 거닐며 나는 다시 새로운 내 길을 찾아가 보려는 용기를 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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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재 : 경남 산청 박호원의 재실,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지로 알려진 곳. 이사재 뒷마당에는 400년 넘은 배롱나무가 있다. 경남 문화재자료 제328호
*안평대군 : 세종의 셋째 아들,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 서예가로도 유명하여 대표작으로 <몽유도원도발문>,<세종대왕영릉신도비>,<청천부원군심온묘표>,<임영대군묘표>가 있다.
*호환마마 : 두창 바이러스로 발생하는 감염병. 마마. 이 병에 걸리면 살아남기 어렵다 하여 두창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이 귀신을 ‘호귀마마(胡鬼媽媽)’, ‘손님’으로 떠받들었다.
*달성 태고정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 있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사육신 박팽년 관련 누정. 정자. 보물 제554호
*달성 도곡재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 있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도곡동 박종우의 재실. 대구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32호
*달성 삼가헌고택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 있는 조선 후기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발당. 연못 등으로 구성된 주택. 국가민속문화재 제104호
*달성 하목정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 있는 조선 후기 의병장 이종문이 건립한 누정. 정자. 대구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36호. 1604년 건립한 것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집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이종문의 장자(長子)인 이지영(李之英)에게 하목정이란 당호를 써주었다고 전해진다. (전체: 네이버 및 다음백과 사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