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교육을 받은 내가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과정
공교육은 늘 정의를 말했고 정의는 곧 **‘평등’과 ‘약자 보호’**라는 단어와 함께 다녔다. 사회 교과서와 도덕 시간엔 강자에 맞선 약자의 승리가 언제나 아름답게 그려졌고 ‘선한 시민’이 되기 위해선 약자를 위하는 쪽에 서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그걸 의심하지 않았다. 정치적 관점으로 보자면, 전형적인 진보주의자였다.
그곳에서 다른 세계를 만났다. 그곳엔 기득권 가정의 아이들이 많았다. 기업인의 자녀, 전문직 부모를 둔 친구들, 소위 말하는 강자의 자식들. 나는 막연히 ‘그들은 부유하니 세상 편하게 살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의외의 무게와 고통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가정불화, 부모의 기대, 조용한 무력감, 그리고 성취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조급함. 그건 약자의 고통과는 다른 결의 것이었지만, 분명 고통이었다.
단지 잘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했다. 이들이 부유한 이유는, 어쩌면 단지 그 부모가 자식을 더 나은 환경에 놓고 싶었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부모가 된다면 내 자식이 나보다 더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을까?”
그 마음은 악의도 아니고, 불의도 아니다. 그건 사랑이다. 한 아이가 좋은 교육을 받도록 돕고 경제적 안정을 주고, 안전한 집과 병원과 네트워크를 제공한다면 그건 단지 내 아이를 보호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열망일 뿐이다. 그리고 그 본능은 자연스럽게 결과의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불평등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악일까? 아니면 도덕적으로 정당한 사랑의 결과일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길 바라는 마음은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출발점까지 완벽하게 통제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억지로 맞추려 할 때 오히려 가족의 선택, 인간의 욕망, 개별적 노력은 억압당한다. 나는 이제 ‘절차적 공정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회를 누릴 자격이 있는가, 그 과정은 투명했는가, 부당한 수단이 개입하지 않았는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결과가 평등하지 않더라도 그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여전히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사회를 경계한다. 그러나 이제는 강자에 대한 단순한 혐오도 똑같이 경계한다. 평등은 중요한 가치지만 그 평등이 인간의 사랑과 본능, 그리고 가족이 만들어낸 구별까지 지우려 한다면 그건 정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평등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불의에 둔감한 자유주의자도 아니길 바란다.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조금 더 현실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2025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