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법은 왜 삶을 따라가지 못하는가

과정 없는 판단과 죽은 정의의 구조

by 민진성 mola mola

그 어려운 걸 하라고 권위와 명예를 주는 거 아닌가?

법이란 본래 쉽지 않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약속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 불완전한 기억과 복잡한 사정 속에서 최선의 판단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다. 그래서 우리는 입법자에게 권한을 주고, 법관에게 판결권을 주며, 공무원에게 해석의 책임을 부여한다. 그 어려운 걸 그들이 대신 하라고 말이다. 그런데 법은, 그 어려운 걸 ‘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법은 왜 삶을 단순화하려 드는가?

현행 법체계는 인간을 ‘정의 가능한 대상’으로, 관계를 ‘법적 요건의 충족 여부’로 환원시키려 한다.

1. 당신은 자녀입니까? → 유전자 검사로 확인됨.

2. 당신은 혼외자입니까? → 인지 여부가 쟁점입니다.

3. 사망자는 그걸 알았나요? → 상관없습니다.

마치 삶이 기계적인 요건 충족 게임인 것처럼.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인생은 고정된 요건이 아니라, 계속되는 과정이다

사람은 변하고, 관계는 흘러가며, 책임과 애정은 오랫동안 쌓이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삶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선택과 후회, 연결과 이별이 이어진 흐름이다. 이 흐름 속에서 생긴 삶의 설계를, 법은 단 한 줄의 요건 충족으로 무너뜨리기도 한다. "친생자 맞죠? 그럼 상속하세요.", "그 사람이 그걸 몰랐다고요? 유감입니다." 그건 법이라기보다는 실체를 무시한 문서 행정에 가깝다.



과정 없는 판단은, 정의가 아니다

우리가 법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 법이 삶의 복잡성을 감당하려는 노력을 보여줄 때다. 그런데 지금의 법은 너무 자주 “복잡하니까 제외”, “애매하니까 기계화”라는 회피의 논리를 선택한다. 그 결과,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누적되고, 죽은 자의 명예는 지켜지지 않으며, 법은 사회와 점점 멀어지는 언어가 된다.



필요한 것은 과정철학의 시선이다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는 말했다. “실재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과정이다.” 그 철학이 법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자격은 요건으로만 판단되어선 안 되고, 그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가라는 과정 전체의 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혼외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 존재가 ‘법적으로 자녀인지 아닌지’를 넘어서, 그 관계가 어떤 시간과 정황 속에서 만들어졌고 그 숨김과 무지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함께 보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 어려운 걸 감당할 때, 법은 존경받는다

지금의 법은 종종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건 너무 복잡해서 법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걸 판단하는 게 법의 본질이다. 그 복잡함을 감당하라고, 우리가 그들에게 권위와 명예를 준 것이다. 우리가 납세를 통해 준 연봉은, 쉬운 답을 반복하라고 주는 게 아니다. 우리가 법조계에 부여한 권위는, 사회적 책임을 끝까지 생각하라는 요청이다.



정의는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장이어야 한다

정의란 결국 한 사람의 삶, 한 가정의 구조, 한 사회의 흐름을 한 문장으로 단정하지 않고, 한 생의 문맥 속에서 판단하는 힘이다. 법이 삶을 따라가려면, 법도 과정이자 대화여야 한다. 너무 빨리 결론 내리지 말고, 한 문장을 더 읽고, 한 관계를 더 살펴보고, 그리고 나서 판단해야 한다.



법이 정의로울 수 있으려면

그 정의는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삶이 고정되지 않았듯, 사람도, 책임도, 관계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 흐름을 무시한 판단은 결국 “법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러니 이제는 묻자. 법은 누굴 위한 것인가? 무엇을 지키기 위한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살아 있는가?




#20250710



keyword
이전 08화해체할수록 부러운 직업,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