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그 이면의 지역 감수성과 문화적 불균형
에어컨 없이도 여름을 나는 나라들이 있다. 유럽이다. 습도가 낮고, 그늘만 찾으면 선풍기 하나로도 충분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게다가 유럽 대부분은 중위도 이상의 지역에 위치해 있어 태양 고도가 낮고 햇빛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스레 냉방에 대한 수요도 적다. 덥지 않으니 덜 쓰고, 덜 쓰니 전력도 덜 쓴다. 탄소 감축?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기본값이 낮다.
그런데, 그 기준이 세계 표준이 되어선 곤란하다. 우리는 유럽이 아니니까.
서울, 도쿄, 방콕, 두바이. 여름철 도심은 땀이 흐른다기보다 피부에 습기가 들러붙는다. 30도가 넘어가는 기온과 80%에 육박하는 습도는 숨쉬기조차 어렵게 만든다. 이 지역에서 냉방은 생존이다. 공공건물에 에어컨을 틀지 말자는 운동은, 유럽에서는 친환경일지 모르나 한국에선 비인간적이다.
기후 현실은 국경을 나눈다. 탄소중립을 위한 희생 역시 동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균형은 대부분 더위에 지쳐가는 나라들이 떠안는다.
글로벌 기후정책은 '정의롭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 정의는 어디에 기초하는가? 경제력이 높은 국가, 쾌적한 기후를 가진 국가, 이미 오래전부터 전력 인프라가 안정된 국가들. 그들은 적게 써도 충분하다는 경험에서 '감축'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편리함에서 온 규범이다. 덜 필요한 이들이 더 필요한 이들에게 절제를 요구할 때, 그건 평등이 아니라 강요다. 기후 정의는 정의의 언어를 빌려 불의를 재생산한다.
기후 감수성은 문화적 요소이기도 하다. 유럽에서는 “덜 쓰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다르다. 땀 흘리는 노동이 일상의 일부이고, 정장 차림으로 밀집된 지하철을 타는 구조적 강제성 속에서 ‘덜 쓰자’는 말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처럼 들린다.
덜 쓰자고 할 게 아니라, 왜 이렇게까지 써야만 하는지 그 구조부터 질문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후 정의의 출발점이다.
모든 국가에 동일한 감축량, 동일한 시기, 동일한 수단을 요구하는 것은 글로벌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성과 문화성을 지운다. 평등한 목표는 비평등한 현실을 무시할 때 오히려 불공정해진다.
지구는 하나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러니 정의는 '같이 가자'가 아니라 '다르게 가자'여야 한다.
#202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