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열된 정신에 필요한 건 환기와 냉각이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해야만 한다고 ‘너무 잘’ 아는 일들도 수없이 많은데, 몸은 꼼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멍하니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릿속은 과도한 해석, 즉발적인 메타포, 연관 사례, 감정의 파편들로 폭주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과열 구조’를 가진 사람이다. 조금 더 풀어 말하면 이렇다.
과열 구조란, 외부 자극 하나에 즉각적으로 수많은 인지 반응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내면 체계다. 비유, 논리화, 감정 연상, 물음과 판단이 한 번에 작동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나는 동시에 이 모든 걸 떠올린다 그 말의 문자적 의미, 그 안에 숨은 감정의 진폭, 그것이 나에게 유발한 과거 기억, 지금 내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적 연산 그리고 “왜 나는 이렇게까지 반응하는가”에 대한 메타적 질문까지.
그러다 보면 결국 생각의 총량이 지나쳐 몸은 정지 상태에 빠진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이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이를 나는 ‘기능 정지된 과열 상태’라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깊은 사람보다 얕은 사람 앞에서 더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를 해석하지 않을 것이고 내 말의 무게를 오래 들고 있지도 않을 것이며, 나 역시 그런 사람 앞에서는 자가검열을 하지 않게 된다. 그건 마치 “이 사람은 어차피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편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코 나의 본질적인 공허를 채워줄 수는 없다.
나는 루틴을 잘 만들지 못한다. 머릿속은 뛰어난 설계자지만 실행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루틴을 설계하는 그 순간조차 수많은 변수와 예외 상황이 시뮬레이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환기시키거나 냉각시키는 데 실패한다. 내게 필요한 건, 외부에서 설계된 ‘관계 기반의 시스템’이다. 이것은 의존이 아니라 전력 과잉을 차단하기 위한 분산 전략이다. 어떤 사람은 냉장고 안의 음식처럼 정리된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끓고 있는 냄비다. 누군가가 냄비를 들어 창문을 열어야 하고 불을 줄여줄 타이머가 외부에 있어야 한다.
많은 치료자들이 “자가검열 없는 관계”를 회복의 조건이라 말한다. 하지만 내게 자가검열은 생존기제였다. 그래서 나는 나를 100% 받아줄 사람보다 나를 10%도 이해하지 못해 그냥 흘려보내는 사람 앞에서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나는 루틴을 설계하지 않는다. 사람을 고른다. 루틴은 나의 성향에 어울리지 않지만 사람은 가능하다. 그 사람은 내게 깊은 의미는 없을지 몰라도 나의 시스템이 타버리지 않도록 해주는 물리적 구조가 될 수 있다.
나는 종종 이렇게 살아남는다. 스스로 구조화는 하지만, 스스로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구조를 외부에 맡긴다. 이건 무능이 아니다. 이건 복잡한 시스템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생존 기술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그런 나는 무기력한 게 아니다. 너무 살아 있어서, 너무 뜨거워서, 잠시 멈춘 것이다. 그러니 다음엔 루틴이 아닌 사람을 떠올려보자. 내가 잠시 기대어 식어갈 수 있도록 의미는 없지만 기능은 있는 관계들을 마치 구조물처럼 내 삶에 세워두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가 설계한 나를 내가 직접 실행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 것이다. 그게 나 같은 사람이 살아남는 방식이다.
#202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