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 정지와 존재의 역설에 대하여
가만히 멍하니 있거나 아무 쓸모도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내가 죽음으로 한 발 더 가까워진다는 기분이 든다. 농담처럼 말하면, 의미 없는 행동은 “죽음까지의 여정을 단축시키는 것” 같다. 그건 그냥 기분이 아니다. 실존적인 공포다.
나는 늘 의미를 찾았다. 공부를 하든 글을 쓰든 쉬는 시간을 보내든. ‘이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나는 지금 어떤 흐름에 있는가’를 분석하고 해석하고 구조화해야만 존재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모순은 여기서 발생한다. 나는 의미 없음을 피하려고 온 힘을 쏟았는데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의미 없는 삶에 도달했다.
그게 바로 기능 정지였다. 움직일 수 없고, 생각은 과열되어 터질 것 같고,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 상태. 그리고 그 상태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렇게까지 피하려고 했던 의미 없음 그 자체였다.
보통 사람들은 말한다. “일단 해보면 의미가 생긴다.”, “살다 보면 의미가 따라온다.” 하지만 내게는 “의미가 먼저 확보되어야만 행동이 가능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공허하고 허무하고, 무가치해졌다. 그리고 그 무가치함은 “살 이유 없음”으로 직결됐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죽음을 아주 오래 고민해왔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존재이다(Sein zum Tode).” 그에게 죽음은 단지 육체적 끝이 아니었다. “죽음에 직면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자기를 발견한다”고 믿었다. 죽음은, 인간을 진짜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반전의 장치였다. 카뮈는 부조리(absurd)라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으며, 그 의미 없음과 마주하는 태도가 인간의 진정한 자유다.” 그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의미 없는 반복 속에서도 돌을 밀어올리는 인간의 의지를 노래했다. 의미가 없음을 절망으로 삼지 않고, 그 안에서 버티는 능동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내게 그건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돌 앞에 주저앉은 사람이다 나는 돌을 굴릴 힘조차 없다. 그건 무기력이 아니라 “내가 굴리는 이 돌이 정말 의미 있는가?”라는 질문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나는 해석을 멈추지 못한다. 그래서 움직이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최근 나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의미 없는 걸 견디는 방법을. 그건 포기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의미 없음’이라는 지옥을 잠깐 통과해보자는 시도다. 살아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 “이건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해볼게.” 이건 내가 시지프처럼 강해서가 아니라 그 돌 앞에서 주저앉은 나를 그대로 살아 있게 만들기 위한 말이다.
지금 나는 행동이 의미를 낳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아주 조금씩 믿어보기 시작했다. 그건 전혀 아름답지 않고 극복도 아니다. 그저 “아직 죽지 않기 위해” 하는 움직임이다. 이건 사는 게 아니라 “아직은 죽지 않기”라는 의지의 최소 단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살아 있는 증거다.
#202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