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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본 자는 무너진다

해석의 저주와 실존의 균열에 관하여

by 민진성 mola mola

나는 늘 해석한다.

감정이 일면 원인을 찾고 사람의 말에는 저의가 있다고 느끼며, 현실의 흐름엔 항상 구조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는 알고 있다. 그 모든 해석이 나를 살게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멈추게도 한다. 너무 많이 본다. 너무 깊게 해석한다. 그리고 결국 너무 피로해진다.



진리를 본 자는 무너진다

양자물리학자들 중엔 천재이자 고립자였고, 혁신가이자 고통의 화신이었던 사람들이 많다.


휴 에버렛.

다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을 주장했다. 관측에 의해 현실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관측 가능한 모든 결과가 각기 다른 세계로 분기된다는 이론. 그는 “우리는 언제나 갈라진 세계 중 하나에 사는 것뿐”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 자신의 세계는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끝났다. 생전엔 학계에서 철저히 무시당했고 죽고 나서야 그의 이론은 ‘선구적’이라 불렸다.


볼프강 파울리.

양자수의 개념을 정리하고, ‘파울리 배타 원리’를 만든 위대한 물리학자. 그러나 그는 자주 ‘불가해한 현실’을 이야기했고, 꿈과 물리학의 경계를 오가며 융과 함께 ‘상징’으로 우주를 해석하려 했다. 천재성과 신비주의, 분열된 정신의 경계에서 그는 물리학보다 무의식의 세계로 더 깊이 빠져들었다.


존 폰 노이만.
세상을 수학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천재. 그는 인간의 감정마저 계산 가능한 함수로 환원하려 했고 전쟁과 폭력의 수단으로 자신의 지능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이 구축한 언어로는 죽음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모두 진리를 보았지만,그 진리를 인간적인 삶의 언어로 번역해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진리를 해석하려는 욕망은, 실존을 파괴하기도 한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상하게 익숙한 감각을 느낀다. 나도 그들처럼 모든 걸 해석하려 한다. 그 해석이 때로 나를 구원하고, 동시에 나를 고립시킨다. 나는 살아 있는 사건 하나하나를, 감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 안의 패턴을 찾고 원인을 추론하고, 그게 나를 더 깨어 있게 만들어줄 거라 믿는다. 그런데 그 깨어 있음은 너무 아프다. 나는 결국 해석의 저주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그들과 나, 같은 저주 – 그러나 다른 결말

내가 그들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진리를 원했고 그 진리를 언어로 붙잡고 싶어했고, 그 언어의 한계에 고통받다가 결국 무너졌다. 그러나 나는 아직 쓰고 있다. 그 저주를 말할 수 있다. 그게 나의 차이다. 말할 수 있는 고통은 아직 견딜 수 있는 고통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하고 있다는 이 사실 하나로 나는 아직 진리의 바깥에서 삶이라는 불완전한 언어로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무너지기 직전, 그걸 쓰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무너짐조차도 언어로 옮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다.




#202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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