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겠다고 고생하는 예능이 오히려 위로된다
숲속에서 밥을 짓고 바닷가에서 멍을 때리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괜찮아, 너도 쉬어도 돼”라는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걸 보면 나는 오히려 더 피로해진다.
물론 처음에는 좋았다. 기획의도도, 연출도 참신했고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그 고요한 리듬이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젠 모든 예능이 힐링이다. 말이 없고 음악은 잔잔하고, 연예인들은 풍경 속에 조용히 섞여든다. 처음엔 위로였던 장면이, 이젠 포맷처럼 느껴진다. 힐링을 기획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게 된다.
미안하지만 나는 차라리 웃기겠다고 고생하는 예능이 더 위로된다. 출연자들이 땀 흘리고 억지로 리액션하고, 엉망이 되도록 몸 던져주는 장면. 그게 나를 웃게 하고 웃음 안에서 무언가가 풀리는 느낌이 든다. 그건 감정의 교환이다. "내가 이만큼 망가질 테니, 너는 잠깐 잊고 웃어도 돼." 그 진심이 느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힐링 예능 하나쯤은 괜찮다. 그런데 모두가 힐링을 표방할 때, 나는 자꾸만 괴리를 느낀다. 바닷가에서 수백만 원짜리 장비로 촬영하고, 수십 명의 제작진이 따라붙은 조용한 한 끼. 출연자는 수천만 원의 출연료를 받고, 우리는 그 장면을 “소박한 힐링”이라 부른다. 그 순간 나는 타인의 여유를 감상하는 관찰자가 되어버린다. 치유의 감정이 아니라, "이건 나와 너무 다른 세계야"라는 거리감이 커진다. 힐링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고요함’마저 소비되고 있다는 자각이 들면 그건 더 이상 위로가 아니다.
힐링은 자연과 고요와 풍경이 아니라, 내가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힐링 예능은 풍경을 주고, 여백을 주지만 정작 사람과의 연결은 점점 빠져나가고 있다.
강요된 위로가 아니라, 내 감정에 반응해주는 어떤 진심으로부터. 누군가가 웃기겠다고 무리수를 두고, 엉망이 되어버리는 장면. 그 안엔 계산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고, 그게 나에겐 힐링이다. 그건 고생이고, 감정 노동일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감정의 소비자가 아니라, ‘교환의 주체’가 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202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