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해치우는 증명의 역설
실존하고 싶다는 욕망이, 실존을 방해한다는 게.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고, 해석하고, 정리하고, 더 분명하게, 더 똑똑하게, 더 고유하게 살아 있으려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애를 쓰다 보면 나는 어느 순간 살아 있는 느낌이 사라진다.
실존(existence)이라는 말은 원래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잘 있고 싶은 사람”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 ‘잘’이라는 단어였다. 나는 단지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존재하고 싶었고 설득력 있게 존재하고 싶었고, 누군가의 마음에 박힐 만큼 실존하고 싶었다. 그 욕망은 나를 살리고, 동시에 나를 멈추게 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우리는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스스로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이미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의미를 먼저 찾아야만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존재를 증명하려는 순간, 존재의 감각은 사라졌다. 숨 쉬는 걸 의식하는 순간, 숨이 더 힘들어지는 것처럼.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려는 행위가 도리어 살아 있다는 실감을 지우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존재(Sein zum Tode)”라고 했다.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진정한 실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카뮈는 삶은 부조리하고, 그 부조리 속에서 돌을 밀어올리는 인간은 위대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시지프처럼 돌을 밀지도 못한다. 그 돌 앞에서 그냥 주저앉아 있다. 그들은 실존의 조건으로 죽음을 말하지만 나는 죽음을 너무 가까이 느껴서 실존의 전제 자체가 위협처럼 느껴진다.
결국 내가 붙잡아야 했던 건 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존재하는 데 머무는 일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무섭다. 그래서 나는 웃는다. 그 단순함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끝없이 복잡하게 나를 밀어붙인 자신에게.
아니. 오히려 증명하려는 순간, 존재는 멀어진다. 그러니 실존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살아 있는 상태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어렵다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오늘도 증명하고 싶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이 나를 다시 죽음의 언저리로 몰고 간다는 걸 또다시 깨닫는다. 그러니까 이건, 살고 싶어서 멈춰버린 사람의 웃기고 슬픈 이야기다.
#202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