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지 않은 30분
산티아고 순례길을 혼자 걸을 때, 사람이 있어도 무섭고 없어도 무서운 마음을 보았다.
먼 타국에서 들판과 산길을 혼자 걷는 일에 두려움이 전혀 없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순한 그림자에도 움츠러드는 과도한 불안은 서러웠다.
그때 처음 두려움의 망상과 믿음의 실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근거 없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망상에 가까웠다.
오래 가져온 불안이 문득 지겨웠다.
불안하다고 바뀌는 건 없다.
불안하다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출구 없이 시달리기만 한다. 가만히 보면 이상한 일이다.
분노가 외부의 침범으로부터 경계를 지키는 감정이라면,
불안은 내부에서 경계를 벗어나지 않게 하는 감정이다.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여 위험에서 지켜준다.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대책 없이 덤벼 손상을 입지 않게 하는 보호 본능이다.
거대한 파도를 향해 서핑보드를 들고나가지 않게 하는 경고 신호이다.
불안은 편도체에서 감지한다.
뇌에서 편도체를 제거한 원숭이는 우리 안에 들어온 뱀을 가지고 놀았고,
쥐는 천적인 고양이를 친구처럼 대했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이렇게 보면 ‘불안’이라는 감정 없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불안은 늘 적당하지 못하다.
개념도 범위도 없는 불안에 오래 시달렸다.
경계가 무너진 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경계'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심리적 선을 말한다.
어디를 지키고 어디를 세워야 하는지 몰랐다.
안전한 곳이 어디인지, 무엇은 덤벼볼 만하고 무엇은 피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이 준비를 하면 해 볼만 한 건지 가늠하지 못했다.
보통 이런 사람은 ‘흑 아니면 백’, ‘도 아니면 모’와 같은 극단적인 성격을 갖는다. 중간이 없다.
‘백과 모’ 보다는 ‘흑과 도’에 처박혀 움직일 줄을 모른다.
반복적으로 경계를 침범당한 사람은 누가, 무엇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
쳐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당해야 하기에 언제나 방어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것이 만성적인 불안이다.
그러니 일단 무엇이 가장 불안한지 정체를 알아야 한다.
처음부터 정확히 알 수 없다.
'이것인가?' 하고 탐색하다 보면 '아, 이거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그러다 ‘이것도 무섭잖아!’라며 새로운 불안을 발견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정체를 알아내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보겠다고 선택해야 보인다. 눈을 뜨고 있어도 의도가 없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저게 뭐지?’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모습이 드러난다.
예측이 가능하면 불안이 줄어든다.
물론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없고, 예측이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측이 가능하면 대비할 수 있다.
우선 30분,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시간을 정해보자.
올라오는 불안감을 관찰하며 내면의 경계를 지켜보자.
30분 동안 누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를까? 갑자기 비난을 퍼부을까?
갑자기 건물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질까?
도로를 달리는 차가 인도로 쳐들어와 덮칠까?
30분이라는 가까운 미래는 높은 확률로 예측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상식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자.
몸의 힘을 빼고 이 상식 위에 누워 버리자.
작은 시간부터 조금씩 불안을 다스려 나간다면, 과도한 불안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다.
불안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지만, 그 감정에 갇혀 존재가 쪼그라들 때가 많다.
불안의 정체를 직시하고, 스스로를 이해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죽을 것 같은 불안에 질식할 수도 있다.
이 때는 그 생생한 감각이 오래된 기억에서 올라오는 느낌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과도한 불안은 오랜 습관이다.
오래된 불안에 매몰되지 않고 실체를 보려는 의도와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불안하지 않은 시간을 점점 늘려갈 수 있다.
그러다 마침내 불안의 모래 바람이 걷힌 맑은 하늘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