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차례는 이른 아침에 지내므로 추석 이틀 전에는 장을 봐야 한다. 평소 마트 가는 것은 쇼핑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명절 상차림은 굳이 장을 본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벌써 범상치 않다. 조상의 차례를 모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음식을 만든다는 사명감에 한껏 충만한 여자들의 얼굴은 왜 전부 비슷할까?
마트, 어물전, 과일전, 그리고 채소가게까지 순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생선 다듬어 달라 해놓고 깜빡 있고 왔다’는 뻔뻔한 호들갑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다시 한번 시장까지 왕복했다. 그래! 내 조상 차례 모시는데 이 정도는 참을 일이다.
차례를 모시면서 나는 가끔 슬픔을 느낀다. 가급적 크고 예쁜 제수 품을 골라 정성 들여 씻고 다듬어 공경하는 마음으로 차례 상에 올렸으니 보기 좋지 않을 수 없다. 전을 포함한 다른 음식들도 평소 해서 먹는 것과는 달리 소위 ‘정성’이 가미돼 단정하고 보기 좋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사과의 크기나 포도의 탐스러움, 단아하고 포실한 송편의 그윽함이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 또한 추석이 다소 빨라 미처 익지 않은 감을 올려놓은 것에 분노하고 대안으로 사용한 곶감 색깔이 곱지 않고 거무튀튀한 것에 남 들으라고 한 숨을 과도하게 크게 쉬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추석 차례에 있어 조상의 자취가 큼직한 사과나 배보다 못한 것 같아 슬픈 것이다.
조상께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으로 비대한 과일과 한우 투뿔로 두툼히 잘 구워진 적에 경배를 바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황당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추석은 뜨거운 여름을 견뎌내고 그 결실에 감사하며 하늘과 조상에 제사를 지낸다는 절기이다. 이미 천 년도 넘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우리의 고유 명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서양에도 비슷한 의미의 절기가 있는 것을 볼 때 농경 인류의 주기적이고 보편적 절기라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유발 하라리의 시각에서 본다면 잉여 식량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래 발생했다. 이는 지배자와 엘리트 출현의 원동력이 되었고 제사는 지배자와 엘리트들의 중요한 통치 요소로 기능했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라고 한다면 나의 조상은 ‘극소수’ 보다는 ‘모든 사람’에 포함된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따라서 보통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제사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극소수만의 특권인 제사와 차례가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극소수가 된 것은 아닌 채로 말이다.
극소수들은 모든 사람의 노동력을 동원해 상상의 의식을 장엄히 거행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다른 집단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들 중에서 지배자(조상), 엘리트(남자) 그리고 모든 사람(여자)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창조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것이 틀림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 자기가 자기 뺨을 후려갈기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가 조상 또 신(神)이라고 제사(예배) 드리는 존재는 지극히 일방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보려고 해도 볼 수도 없고 만지려고 해도 만질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고 주민등록 주소변경 여부와 관계없이 강림하며 세속적인 일에 개입해 판단하며 희(기쁨), 노(분노), 애(사랑), 락(즐거움), 애(슬픔), 오(고통), 욕(욕망)의 감정이 있는 것으로 상상된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철저히 교육받았으며 여럿이 같은 이야기를 하므로 객관적 실제로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상상의 질서로부터 탈출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유발 하라리의 절망스러운 고백으로 확인된다.
(우리는)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이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일 뿐이다.
추석이 우리만의 고유 명절이 아니듯 지구상에 고유문화는 없다. 특히 음식은 더 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카이사르(시이저)는 토마토소스를 넣은 이탈리안 스파게티를 먹어본 일이 없다. 토마토는 멕시코가 원산지이다. 공자나 맹자 그리고 진시황은 매운맛의 마라 후어구어(중국식 샤부샤부)를 먹어본 일이 없다. 세종대왕의 밥상에 우리가 먹는 김치가 올라간 적은 한 번도 없다. 고추도 멕시코가 원산지이다. 내가 어릴 때 제사상 사과는 홍옥 아니면 국광이었다. 그러던 것이 시나브로 부사로 바뀌더니 지금은 홍로라는 다른 종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생전에 맛보지 못한 그 무엇을 흠향해야 하는 귀신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유발 하라리는 세상의 신념을 ‘신(神) 중심의 종교’와 ‘신 없는 이데올로기’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 모두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축이다. 어차피 모두의 신이나 모두의 이데올로기와 같은 객관적 상상이 필요한 것은 극소수의 지배자와 엘리트 들이지 모든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사와 차례는 조상귀신을 중심으로 한 경건함과 종법질서로 표현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착종돼 형성된 문화로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돌아가신 조상을 이용해 가족 구성원 속에서 극소수의 권력을 구축하고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이데올로기 일 수 있다. 특히 같은 성(姓)이 아닌 다른 성씨의 노동력 착취는 오랜 시간 전통으로 자리해 왔다는 시각은 반대편으로 지나치게 경도된 생각일까?
유발 힐라리의 윤리에 대한 통찰은 보고 싶지 않아 외면했던 우리의 과거를 눈앞에 들이댄 느낌이다.
윤리의 역사는 아무도 그에 맞춰 살 수 없는 훌륭한 이상들로 점철된 슬픈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예수를 모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불교도는 부처를 따르는데 실패했으며, 대부분의 유생들은 공자를 울화통 터지게 했을 것이다.
과거 어머니는 힘에 겨워 작은 한 숨을 몰래 내쉬며 힘든 차례 준비를 여러 날 하셨다. 어려운 시기에 그렇게 큰 수고를 왜 주기적으로 하셨는지 빈대떡을 부치기 위해 녹두알을 일어 뉘를 구분하듯 차근차근 들여다볼 참이다. 아마도 그 중심에는 조상귀신과 금쪽같은 자식들을 지나 아버님에 대한 사랑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사랑 표현을 위해 왜 힘들게 빈대떡을 부치느냐고 툴툴 대겠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빈대떡을 뒤집는 아내의 뒷모습이 고맙고 미쁘게 느껴지는 건 그래도 지킬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없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무시한다”라고 한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의 말은 추석 차례를 새롭게 정의하는데 영감을 준다. “나는 (세상에) 안 계신 분을 추억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생각을 조금만 더 정돈하면 내 자식에게 물려줄 제사의 모습이 가다듬어질 것 같다.
2021년 추석은 역병으로 인해 모일 수 있는 사람 수를 정부가 정했다. 그래서 부득이 차례에 참석하지 못한 가족 구성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귀찮은데 안 가서 좋을 수도 있고, 모처럼 만나는 자리에 함께하지 못해 속상할 수도 있고 누군 되고 누군 안 되느냐는 발상으로 섭섭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은이는 아무 말 없이 작은 꽃 화분을 보냈다. 가을날 요 작은 국화는 어머니가 무척이나 좋아하던 꽃이었는데........ 차례에 쓰는 향기 좋은 술의 노란빛보다 무척 밝고 환한 꽃이 제단 밑에서 다소곳이 차례 지내는 내내 함께 했다.
아이들의 세상에도 추석이 존재하길 바란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노동과 번거로움의 모습으로 있는 것은 마뜩잖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