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人文)이란, 사람(人)의 무늬(文=紋), 즉 사람이 살아왔고 살아가는 모습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자’란 당연히 사람과 사람의 무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어떤 인문학자는 새를 관찰하고 보여준다. 하지만 인문학자가 ‘보여주는 새 이야기’는 결국 새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이야기 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람과 새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가 된다.
참새만 한 조그만 새의 눈썹 색깔이 노란색이냐 흰색이냐에 따라 황금새와 흰 눈썹 황금새가 구분되는데, 이 차이가 창조론과 진화론을 이야기하는 계기가 된다. 아주 작은 차이인데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다름을 가지는 이유가 뭘까? 창조주가 장난꾸러기라서 이 녀석과 저 녀석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다양성이 생물의 본질’이라는 다윈의 과학적 이론이 맞는 것인가? 저자는 “세상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다”면 ‘적어도 그의 눈에는’ 창조론이니 진화론이니 하는 논쟁은 부질없어 보인다고 한다.
그는 암울한 6.25 시대의 빈궁한 삶을 배경으로, 종달새와 부엉이 새끼를 꺼내와 기르고, 꿩알을 삶아 먹고, 참새를 구워 먹는 어린아이들의 부산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명 바지 저고리와 화장기 없던 무채색의 배 경위에 청록색, 녹색, 그리고 짙은 주황색이 금속광택처럼 반짝이는 물총새를 보여 주었다. 빈궁했지만 마음은 빈궁하지 않았고, 흑백의 삶이었지만 금속광택이 반짝이는 물총새가 있던 유년 시절은 “사랑”의 기억을 잠재케 했다.
뜸부기의 알, 그리고 꼬장꼬장하신 아버지......! 남에게 절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남에게 사정해 어렵게 얻어온 뜸부기 알이 깨졌을 때, 꿈같은 유년시절은 아스라한 꿈이 되었다. 깨진 뜸부기알은 그에게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갈 이소(離巢)의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이제 초로(初老)에 이른 저자는 그때의 새들을 되찾으러 다니게 된다.
그의 삶에 사랑의 기억으로 잠재되었던 새와의 만남은 여름날 소나기처럼 외연도를 배경으로 갑자기 쏟아진다. 놀라운 정도로 작고 예쁜, 딱새, 유리새, 썹 울새, 진박새....... 기르는 채소 위, 취사용 가스통, 들판의 쑥 옆, 철조망, 그리고 갯벌과 같은 무심함을 배경으로 그 앙증맞은 자태와 하나도 같지 않은 색깔은 마치 경쾌한 피아노 음악을 듣는 것과 같다. 하지만 수 천 킬로미터 먼 길을 날아와 기진해 죽은, 그래서 혼자된 흰 날개 해오라기의 눈빛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날 TV 오락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고, 그에 따라 늘어난 관광객, 그리고 관광객의 편의를 위한 행정당국의 환경 개선 사업의 어리석음은 모두를 분노케 했다. 결과적으로 수 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지친 새들은 쉬고 기운 차릴 곳이 없어졌다. 관광객들은 새를 보러 오는데, 새가 없어지면 관광객이 두 시간 남짓 멀미를 하며 외연도까지 올 일이 없을 텐데....... 그는 외로워 보이는 먹황새 한 마리를 보여 주었다.
그는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까마귀, 뜸부기 그리고 뱁새 등 흔하디 흔한, 아무것 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했던 새들을 보여준다. 괜히 시큰하고 찡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 들이 ‘아무것’이 되었다.
화려한 빛깔의 남국의 새가 깃털 다듬기 하는 모습 사이에 생뚱맞게 끼어든 참새의 모래 목욕하는 모습들은 무척이나 고맙고 먹먹한 생각이 들게 했다.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참 예쁘다.
새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그는 갑자기 ‘새대가리’ 이야기한다. 어치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고양이 소리를 낸다고 한다. 미어캣 보호자인 드 롱고(Drongo. 까마귀 종류)는 미어캣의 천적인 독수리가 나타난 것처럼 거짓으로 경고음을 보내 미어캣이 떨어뜨린 벌레를 가로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작은 새 동고비와 곤줄박이는 겨울철을 대비해 나무 틈새에 먹이를 숨기는데, 어치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는 저장한 먹이를 훔쳐 간다고 한다. 그는 “새대가리라는 조롱이나 욕의 의미는 인간의 오만함”이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새도 인간도 모두 동등한 ‘지구의 주민’ 일뿐이다”라고 울먹이듯 낮은 톤으로 중얼거린다. 그는 그렇게 사랑의 마음을 다시 갈무리한다.
형산강의 물수리와 숭어, 그리고 숭어를 잡을 능력이 없어 숭어를 빼앗기 위해 물수리를 공격하는 갈매기, 얕은 물가에서 숭어 사냥에 여념이 없는 왜가리, 도무지 인간의 흔적이 없는 날것 그대로의 자연의 섭리를 보여준다. 탁란(托卵)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어미는 남의 둥지에 잠깐 사이 알을 낳고 떠나고, 태어난 아기 새는 본능적으로 숙주 새의 새끼이든 알을 둥지 밖으로 밀쳐내 버린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난 어미 새는 숙주 새가 제 새끼를 기르는 동안 끊임없이 소리를 내 자기가 어미임을 각인시킨다. 그는 모두가 ‘지구의 주민’ 임을 다시 언급한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잠자코 조용히 보는 것 외에 인간의 역할은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이 책의 2부를 ‘프랑스, 홍학 되찾기’로 시작한다. 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카마르그 지방 자연공원, 저자는 당연히 홍학이 번식하는 ‘팡가씨 염호’에 가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새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고 거절당한다. 한국 황해 연안의 외연도와 묘한 대비가 된다. 외연도의 환경은 관광객을 위해 습지 가운데 자연적 도랑을 시멘트 하수로로 만들어 복개했고, 언덕이나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하거나 나무 계단을 놓았고, 팽나무 여러 그루가 있던 풀밭은 붉은 타일로 포장을 하는 것으로 ‘개선’ 되었다. 새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킨 것과 같은 결과다.
그는 우울해진 우리를 보르네오 섬, 남국 새들의 현란한 색의 향연으로 초대한다. 꽃과 잎 그리고 새들의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향연이다. 그렇지만 문득 너무 단 디저트를 먹은 것처럼 과하다는 느낌도 든다. 이때 그는 내리는 비에 온몸이 젖은 채로 둥지에 매달려 입구를 막고 비 가 듣지 않게 새끼를 보호하는 ‘화이트헤드 로드빌’을 보여준다. 이름도 낯설고 여전히 초록과 검정의 이국적인 색깔의 남국의 새이지만 물을 털어내지도 않고 추위를 참고 견디며 새끼를 위해 희생하는 ‘모성’의 모습은 갑자기 ‘현란한 색의 남국의 새 이야기’를 ‘새 이야기’로 다르게 들리게 한다.
저자는 아리안 자야에서 비현실적인 새(극락조)를 보여 주고 가나를 거쳐 파푸아 뉴기니의 새를 보여준다. 정자 새의 비현실적인 구혼 디스플레이, 그리고 극락조의 상상할 수조차 없는 화려함과, 마치 신이 들어 무아의 춤을 추는 무당과도 같은 춤사위를 끝으로 초로(初老)의 인문학자는 새와 사람의 ‘완톡(Wantalk - One talk -같은 부족이란 의미의 피진어)을 이야기하며 끝을 맺는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책장을 넘길수록 자꾸 ‘참새’에게 눈이 갔다. 250장이나 되는 새들의 각양각색의 모습들과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형광 색으로 화려하게 채색한 새들은 점점 눈에서 멀어지고 칙칙하고 못난 참새가 자꾸 눈에 밟혔다.
나가서 얻어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록 아버지께 이르노니,
기름불은 깜빡이며 듣고,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고이신 대로 듣고,
치근대던 어린 누이 안긴 대로 잠들며 듣고,
윗방 문설주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듣고.
(정지용. 옛이야기 구절)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정지용. 향수)
항상 그렇게 있는 아내와 참새가 닮아서 일까? 하긴 그 바지런함과 성가실 만큼 시끄러움도 많이 다르진 않다. 그렇게 무심했지만 참새가 아직도 우리 곁에 있어 고맙고, 무심해 미안했다.
책의 중간을 지나 만난 이름도 생소한 ‘화이트헤드 브로드 빌’은 한동안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학생운동이니 농활이니 야학이니 해야 할 공부는 뒷전에 두고 무척이나 부모님 속을 썩여 드리던 젊었던 시절, 나른한 초여름 오후 졸린 윤리 강의를 듣다가 소스라쳤던 기억이 겹쳤다.
“막 격전이 끝난 철원 시가는 완전 폐허가 되고 연기만 무럭무럭 오르고 있었다. 길만 훤한 시가를 지나다가 나는 문득 타 죽은 닭을 보았다. 그런데 그 닭은 서서 죽은 것이다. 이상하게 여긴 나는 무심코 발로 건드려 보았다. 그랬더니 그 타 죽은 어미닭의 날개 밑에서 병아리 몇 마리가 울며 나오는 것이었다. 코가 시큼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이것이 바로 주역에서 말한 ‘천지 생물 지심(天地生物之心) 임을 깨달았고, 모성애의 실질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김충열 pp.45-46.)
전쟁 통에 타 죽은 닭이 방황하던 청년에게 한동안 잊었던 부모님을 찾게 했고, 남국의 ‘화이트헤드 브로드 빌’이 고민하는 중년에게 방향을 알려 주었다.
극락조는 지상의 새의 외모와는 다른 환상적인 모습이다. 거기에 대해 극락조가 추는 구애의 춤은 화려한 디즈니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하지만 현실의 눈으로 찬찬히 보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선 매우 길고 거추장스러운 꼬리, 그리고 포식자에게, 잡아먹어 보라는 듯한 화려한 색깔, 거기에 큰소리를 내며 춤까지 추며 구애를 하니 자살행위가 아닌가?.
“자히비”의 이론에 따르면 그것이 정말로 행위자에게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신호를 내고 있는 동물이 특히 우수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정직한 지표가 된다는 것이다.(중략) 커다란 꼬리나 뛰어난 노랫소리가 갖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수컷은, 그 외의 것에 대해서도 틀림없이 훌륭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중세의 젊은 여인들이 자신에게 구혼하는 기사들에게 용을 무찌르는 것과 같은 시련을 부과한 후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pp.284-288.)
결국은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내는 극락조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비장미까지 느끼게 한다.
평소에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었던 새 이야기에 빠져 역병으로 답답한 여름 한때를 보냈다. 초로의 인문 학자는 작은 새들의 이야기로 창조론과 진화론을 말머리로 시작해 아득한 유년시절의 ‘사랑’을 소환하고 새를 찾는 여행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해의 외연도와 홍학이 머무는 프랑스를 거쳐 남국에 이르는 그와의 여행은 오후부터 후다닥 쏟아지던 장대비가 밤사이 멎어 추녀 물이 아직 그치지 않을 때 걸린 무지개 냄새를 맡는 것과 같았다.
이 책의 이야기를 보고 난 후에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진다면, 그래서 사람들의 새를 바라보는 시선, 새에 대한 태도, 그리고 새에 대한 이야기가 달라져 지금과는 다른 삶의 무늬를 그려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인문’이 될 것이다. 사람들만의 삶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새의 무늬가 빠진 사람만의 무늬는, 새소리가 빠진 사람들의 웅성거림만 존재하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우리가 새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할 일은 그저 두고 보는 것이다. 다만 멀찍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조용히 그 이름을 불러 주면서....
** 이 글은 『인문학자가 보여주는 새 이야기, 인간 이야기』, 서정기, 지식의 날개(방송대 출판 문화원), 2020. 을 읽고 쓴 독후감이다.
** 사진 설명.
양재천 모래톱 위에 오리 가족들이 모여 있다. (위 사진)
양재천에는 팔뚝 만한 물고기가 그득 하다. 세금 낸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우이다. (아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