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로 맛보는 스시와 사케 이야기를 읽고

by 누두교주

오늘날 세상이 변하는 속도와 규모는 상상하는 것보다 빠르고 큰 것 같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전혀 들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개념들과 사물들이 나타나고 어느새 현실로 구현돼 소비하게 된다. 새로운 개념과 사물들은 우리가 그것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기도 전에 우리를 재촉해대고 우리는 허겁지겁 그것들에 연결되기 위해 노력과 시간과 돈을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뒤처지게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에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내가 왜 뛰는지 어디를 향해 뛰는지 문득 허탈해지는 경험은 나만의 착각일까?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뭐가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밤에는 잠을 자며 하루에 세 번 밥을 먹고 주말에는 대 청소를 한다. 4차 산업혁명이 도래했다고 하지만 소매가 3개 달린 옷은 아직 보지 못했다. 불쾌한 이야기를 할 때 최첨단 휴대전화가 구식 전화보다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시장에서 골라든 사과 몇 알을 집 에와 풀어 보니 썩은 것이 섞여있는 경우는 피식 웃을 수 있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결정해 택배로 배달된 사과 알 중에 썩은 것이 있는 경우는 분노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어릴 적 외할머니는 내 얼굴만 보면 눈을 반짝이시며 “배고프지?” 하셨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밥은 그다지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갓 지은 뜨거운 밥에 반찬 몇 가지. 그리고는 밥상머리에 앉으셔서 많이 먹으라고 채근하시는 게 부담스러운 적이 많았다. 무슨 일인가 며칠 집을 비우신 엄마가 빨리 오시기만 기다렸던 것 같다. 그나마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외할머니가 아쉬울 것이 없어 시간이 갈수록 데면데면 해져갔다.


내가 기억하는 한 어머님은 한 번도 아버님께 해 놓은 밥을 드린 적이 없는 것 같다. 저녁에 아버님이 늦으시면 밥을 주발에 정성껏 담아 뚜껑을 덮어 이불장 이불 사이에 넣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여지없이 우리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늦은 시간 돌아오신 아버님이 씻으시는 동안 딱 한 그릇 밥을 새로 지어 드리신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큰 병을 만나 자주 병원 출입을 하셔도 병원에 계실 때 말고는 아버님 ‘밥’만은 항상 갓 지어 드렸다.


아버님 진지(밥)는 항상 주발에 담아 뚜껑을 덮어 상에 올려 드렸는데 겨울이면 아버님은 밥주발 뚜껑을 열고 부엌에서 안방까지 오는 사이에 맺힌 밥 이슬을 홀짝 드셨다. 그리고는 온기가 남아있는 주발에 청주(주로 차례나 제사 지내고 남은)를 약간 따라 찬기를 지우고 반주로 함께 잡수셨다. 잠결에 듣기로는 회사에 도착하실 때까지 추위를 모르게 하는 효자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밥에 계절을 담기도 하셨다. 겨울이 깊어지면 무를 썰어 넣고 무밥을 지어 양념장에 비벼 먹거나 마아가린(그때는 ‘빠다’라고 했다)을 밥에 녹여 달걀 하나와 같이 간장에 비벼 먹었다. 밥에 보리가 까뭇해지면 봄이 깊어진 것이고 녹색 완두콩이 보이면 여름이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강낭콩을 지나 밤콩이 밥에 보이면 가을이 옆에 온 것이고 그렇게 다시 겨울로 넘어갔다.


스무 살 생일 다음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몇 년이 지나 군에서 며칠 휴가 나온 나에게 아버님 께서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낮게 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서 갓 지은 밥은 잊혀갔다.




어렵게 취직해 처음 해외 출장을 간 곳이 일본이었다. 오사카와 동경을 거치는 일정이었는데 일반적인 인상은 ‘별로 대단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유난을 떤다는 느낌을 가는데 마다 받았다. 과할 정도로 깍듯이 인사하는 버릇이나 습관적으로 과장된 표현을 반복하는 점들이 낮 설고 가식적으로 느껴졌었다.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의식하지 못했던 불편함이 있었고 며칠이 지나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회사 구내식당 점심밥이 맛이 없게 느껴진 것이다. 정확히 반찬이 아니고 ‘밥’이다. 습관적으로 식판에 올려진 밥의 맛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어느 날 그 밥이 맛이 없다고 느껴졌고 불현듯 일본 출장기간 동안의 밥이 생각났다. 미리 퍼서 담아 놓았던 밥은 한 번도 제공받았던 기억이 없었다. 어느 식당을 가던 항상 밥을 바로 퍼서 도자기 그릇에 담아서 내왔다. 밥의 빛깔도 구내식당 밥보다 훨씬 희고 윤기가 있었다. 밥이 밥상의 주인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우리에겐 뭐랄 것도 없는 밥이 왜 일본에선 아직 밥상의 주인일까? 나는 그 답을 일본 사람들이 해석한『논어』에서 발견했다. 논어 구절에 나오는 ‘밥’은 논어 본문에서는 벼를 뜻하는 도(稻) 자를 썼다. 이에 대해 조선을 지배한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는 ‘쌀밥’으로 해석했다. 당연히 우리도 그런줄만 알았다. 하지만 성리학의 권위를 부정했던 오규 소라이는 차원이 다른 설명을했다.


“논에 있을 때는 도(稻, 벼도), 베어서 수확한 것은 화(禾, 벼화)라고 하며, 짚을 제거한 것을 속(粟, 조속)이라 하고, 껍질을 제거한 것을 미(米, 쌀 미)라 하고 껍질을 제가 하였지만 아직 찧지 않은 것을 려(糲, 현미려)라 하고 이미 찧은 것을 양(粱, 기장량)이라고 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이러한 집요함이 성리학의 질곡을 벗고 일본 근대화를 가능케 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등줄기에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수 천년 동안 밥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반적으로 식당에 가면 미리 퍼서 공기에 담고 뚜껑을 닫아 보관하던 밥을 하나씩 주는 것이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상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17세기부터 기존의 밥을 의심하고 분석하고 그들만의 최고의 밥을 만들기 위한 분투를 시작했다.


이러한 밥에 대한 가치 인식이 물리적으로 변화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스시’이고 화학적으로 승화 발전한 것이 ‘사케’이다.

스시는 밥(샤리)과 생선(네타) 그리고 와사비가 어우러진 음식이다. 스시에 사용되는 밥은 사람의 손에 의해 주물러져 사용된다. 하지만 사람의 입에 들어간 후에는 봄날의 벚꽃이 흩날리듯 바로 흩어지면서 생선과 어울려야 제대로 된 스시이다. 계절에 따라 서로 다른 네타를 올리고 그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밥덩이가 식사 거리가 되었고 삶의 일부가 되었고 문화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사케 또는 청주라고 부르는 일본 술(日本酒 - 니혼슈)은 쌀과 누룩 그리고 물로 만든다. 우리가 흔히 ‘고두밥’이라 부르는 밥을 지어 누룩을 이용한 발효를 통해 술을 빚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다른 점은 쌀을 다루는 섬세함에 있다. 특히 쌀을 깎는 도정의 치밀함은 놀라울 정도다. 쌀을 80%, 70% 까지 깎으면 그래도 타원형의 쌀 모양은 남아있다. 하지만 58%까지 깎아내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바뀐다. 여기에 더해 48%, 35%까지 깎아내면 차라리 투명한 색깔로 바뀐다. 물론 쌀을 많이 깎아낸다고 해서 좋은 니혼슈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땅의 쌀과, 물과, 누룩과 기후에 맞는 조합을 찾기 위해 도정에 도정을 거듭한 그들의 섬세하고 치열한 노력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다. 차게 또는 따끈하게 데워 마시는 니혼슈에서 쌀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네 번에 걸쳐 바뀌는 향은 그것이 쌀의 정기임을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봄에는 꽃구경, 여름엔 불꽃놀이, 가을엔 달구경, 겨울엔 눈 구경으로 이어지는 니혼슈의 계절감은 상상으로도 은근한 불콰함이 올라오는 느낌이다.




독일 속담에 “나무가 아무리 자란다고 해도 천국까지 자랄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무엇을 하던 반드시 물리적 한계는 존재한다. 하지만 문화적 변화가 다른 전통과 융합을 통해 상승, 발전할 수 있다면 막연한 한계를 인정하고 포기하는 게으름은 부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밥을 그렇게 저만치 미루어 놓는 나태함에 익숙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본에 쌀농사 짓는 법과 술 빚는 법을 전한 것이 우리라는 사실이 스시와 니혼슈에 이르러서는 목구멍에 맴돌다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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