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구절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논어의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대부분의 인용은 자기 나이와 연계해 "내가 벌써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렀다"거나, "나이 삼십인데 뜻을 세우지 못했으니 안타깝다"라는 등의 방식이다.
고매한 대인, 군자(大人, 君子)들은 저 공자님 말씀대로 어려서부터 공부 열심히 하고 한 점의 미혹됨도 없이 하늘의 명을 알아 깨끗하고 고귀한 삶을 잘 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 말이 소인(小人)의 삶을 사는 우리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아무 관계없는 이야기다! 저러한 삶은 우리가 본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본받으려고 노력한다고 본받을 수도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였던 15살 때 그분이 오셨다.② 그전까지 알던 바와 달리 부모님은 전지전능하지 않았고, 선생님들은 완벽한 도덕적 인격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부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고 주변에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들은 드글드글 했다. 돌이켜 보건대 그때 당시 내 주변에 공부에 뜻을 두었던 친구는 한, 두 명 정도였는데 물론 친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15살에 공부에 뜻을 둘 가능성은 거의 없고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서른 살은 자립하는 시기가 아니라 대출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내 의지와 별 상관없이 '내 집 마련'이란 그분이 세운 뜻을 실천하기 위해 가자미눈을 해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았다. 지금의 삼십 대가 하는 갭 투자, 주식투자 또는 가상화폐 투자는 군자라면 세워서는 안 되는 뜻이다.
사십 대의 삶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은 아이들과 투쟁하는 시기이다. 본인 스스로도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으면서 아이들에게는 학문에 뜻을 두길 바라며 학원 비, 과외비를 벌기 위해 고단한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번 돈을 건네며 그만큼 아이들의 성적이 올라갈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성적은 본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일 다르다면(아이가 공부를 잘한다면) 소인이 군자를 낳은 것이다.
오십이 되면 눈치 볼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윗사람의 눈치 보는 것은 다소 선택의 측면이 있지만 아랫사람 눈치는 필수적으로 살펴야 한다. 에스트로겐이 감소하고 테스토스테론이 증가해 점점 더 씩씩하고 강력해져 가는 그분의 눈치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살펴야 하는 바이다. 누군가 "하늘의 명을 안다(지천명)"고 하면 점쟁이 인가? 하거나 참 좋겠다! 생각하고 만다.
육십 줄에 들어서면 세상이 원망스럽고 매사가 후회스럽고 섭섭해지는 것 같다. 차분히 상대의 말을 경청하며, 어떤 말이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60대는 내 주변에서 보지 못했다. 소인으로 살아온 삶의 퇴적된 결과는, 닥쳐오는 이잣날, 맘 같지 않은 아이들, 이제 다른 생명체로 변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그분, 맘 같지 않은 체력 등으로 수렴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직 갈 길은 먼데 해는 뉘엿뉘엿 칼라를 바꾸니 마음이 조급할 따름이다.
칠십에 이르러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게 되는 것은 힘이 빠져서 그런 걸 아닐까? 아니면 법에 문제가 있거나? 시간이 흘러 나이 먹고 오래 살았다고 도덕군자가 된다면 거북이가 인류의 스승이 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나처럼 살면 칠십이 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고 단지 노쇠함에 따른 체력 저하와 부족한 경제력, 그리고 젊은 날 까불던 것에 대한 그분의 복수가 겹쳐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