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믿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운명이라고 부르면 안 믿고 섭리 또는 인과의 법칙이라고 해야 믿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유사 이래 누구도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명확히 설명한 사람은 없다. 성경이나 불경 어딘가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핏대를 올릴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이던 부처님이던 본인이 직접 쓴 책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 여럿이 쓴 것이니 믿을 수 있는 만큼, 믿지 않을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나의 경우는 운명의 존재를 긍정하며 운명의 작용에 대해 경외하며 스스로 겸손하도록 노력하는 축이다. 하늘 아래 누구도 운명의 사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은 인간이 만든 어떤 권위와 가치도 부정하며, 무심하고 평등하게 지배한다.
한밤의 까마귀는 울지만, 우리는 까마귀를 볼 수도 없고 그 울음소리를 듣지도 못해.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분명히 한밤의 까마귀는 존재한다네. 그게 운명이야.①
얼마 전 들었던 인간 운명에 대한 훌륭한 정의이다. 그렇다고 한 밤에 잠을 설치며 까마귀를 찾아다닐 일은 아니다. 어차피 나는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내가 좋아하거나 해야 하는 일을 시간과 바꾸며, 나이를 더할 뿐이다. 운명의 비위를 맞출 일도 없고 운명의 협박에 굴복할 일도 없다. 그렇게 해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운명이 아닌 잡귀신에 불과하다.
공자가 아끼는 제자 백우가 몹쓸 병(문둥병이라는 설이 있다)에 걸려 죽게 되었다. 공자는 안타까운 마음에 병상의 제자를 찾아 문병을 갔다. 전염성이 있는 질병이고 병세가 심해 공자는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창문 밖에서 제자의 손을 잡고 어찌할 수 없는 독백만을 반복하였다.
백우가 병을 앓자, 공자께서 문병하실 적에 남쪽 창문으로부터 그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운명인가 보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백우는 덕행(德行)으로 유명한 제자이다. 한마디로 말해 착했다. 그러니 공자는 더 비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죽어가는 제자는 스승에게 손을 맡기고 소리 죽여 흐느꼈을 것이고, 자신의 무기력함에 허탈한 스승은 운명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와 백우가 살던 동네의 밤 까마귀는 몇 날 밤이나 이 안타까운 운명을 노래했을까?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할 때, 항상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운명 앞에서 인간이 정한 높낮이가 얼마나 무기력한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무슨 군자가 있고 소인이 있으며 선함이 있고 사악함이 있을까?
밤 까마귀는 매일 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운명의 노래를 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고 가슴에 묻어두는 것은 어리석다. 어쨌든 밤, 낮은 교대로 찾아오고 물은 흘러가며 계절은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