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이 구절을 들었을 때 느낀 점은, 때린 사람은 분명히 왼손잡이라는 점. 그리고 펀치력이 그다지 세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몇백 년을 앞서 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원한에 대해서는 덕으로 보답한다.③
노자(老子)의 말로 도덕경이 출전이다. 노자는 공자를 만났다고 하니 예수님보다 대강 500년은 앞선 사람이다. 예수님이 도덕경을 읽고 그것을 인용하신 건 아닐까?
그런데 작금의 현실을 보면 예수님의 고향인 중동 지방 사람들 중에 오른뺨을 맞고 왼뺨을 돌려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또한 노자의 고향인 중국 대륙 사람들 중 원한을 덕으로 갚는 사람들은 보기 어렵다. 오히려 내 뺨을 한 대 맞으면 상대의 뺨을 두 대 때리려고 흥분하고, 누군가로부터 손해를 입으면 더 큰 손해로 복수하려고 눈을 빨갛게 뜨고 사는 것이 틀림없는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설교나 노자의 가르침은 오늘날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 비록 오늘의 현실에 맞지 않지만, 예수님 말씀이고 노자의 가르침이니 그대로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면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 뺨은 예배당 종보다 더 자주 난타될 것이고, 내가 덕으로 갚아야 하는 원한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늘어날 확률이 높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禮)를 묻는 장면이다. 노자는 예에 대해 "진실과 믿음이 엷은 것이고 혼란의 우두머리다"라고해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논어에서 찾았다. 공자는 노자나 예수님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여쭈었다. "덕으로 원한을 갚으면 어떻겠습니까?"
노자나 예수님의 예를 본다면 공자는 당연히 "옳은 말이다"라고 대답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덕에는 무엇으로 갚겠느냐?"
내게 못된 짓을 한 상대에게 덕을 써버린다면 나에게 덕을 베푼 상대에겐 뭐로 갚을 것이냐? 매우 균형 잡힌 생각이고 합리적인 시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직함으로써 원한을 갚고, 덕으로써 덕에 갚아야 한다"④
공자의 이런 균형 잡힌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논어』를 읽게 하는 것 같다. 나에게 덕을 베푼 사람에게는 덕으로 대해 서로의 도타움을 더할 일이다. 하지만 나에게 좋지 않은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올바른 것(公平正直⑤)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 그 잘못을 일깨워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유도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방문한 ‘기회’는 불청객일 수밖에 없다. 같은 이치로 바르고 선량할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에게 베푸는 덕(德)은 어리석음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
① 마태복음 5:38-42.
② 사실 예수님의 예수가 중국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이 없다. 예수는 '耶稣'라고 쓰고 'yesu'라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