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의 차이점
누군가 나에게 사랑이 무엇이라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는 자칫하면 사랑=방임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조금 설명이 필요한 경우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 놓아두는 것이라고 하겠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세간의 반응은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 놓아두는 것이 너무 모순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나 많은 진리에 가까운 구절들이 모순에 있음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음이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이루려면 그것에 '중요성을 담지 않은 채로 그저 행해야'한다. 도덕경에서는 '성인이 모든 백성의 앞으로 나오는 까닭은 자신을 뒤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에도 역설의 진리가 담겨 있으니 사랑이 관심을 가진 채로 놓아두는 것이라는 구절 정도는 애교가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나의 삶의 모토는 "만물을 사랑하자"는 것이지만, 아직 한없이 부족하여 만물을 사랑하기는커녕 함부로 미워하지 않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온전히 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나는 자식이 어떤 직업이나 삶의 형태를 가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식에 대한 어떠한 욕심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안전하게 맛있는 것 정도 먹이면서 성인이 될 때까지 뒷바라지한다. 오로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것 정도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식에게 관심이 있어야 하니 애기들이 티브이 틀어달라 하면 몇 번 틀어주긴 하지만 교육 프로그램 위주로 틀어주려고 한다. 자식 교육에 영유를 투자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과목의 경우 학습지 정도는 시킨다. 그리고 매일 사랑을 표현한다. 이 정도면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로 적합하지 않을까 한다.
반면 행복은 사랑과 다른 점이 있다. 사랑의 경우 누구를 막론하고 획일하게 정의하긴 했지만, 행복은 그러기가 힘들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포인트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백정이 운명인이는 도살을 하며 희열을 느낄 것이요, 스피드광인 이는 누군가는 겁에 질릴 속도에서 극치감을 느낄 것이다.
행복은 획일화될 수 없다. 고대 철학자들이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것이나 명리학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모두에게는 자기 자리와 자기 행복이 있다. 따라서 행복을 일찌감치 찾는 방법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일찌감치 알고 그것을 영위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라 하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먼저 알면, 자연스럽게 아이가 좋아하는 것도 찾아갈 수 있게 이끌 수 있다.
사랑과 행복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어째 반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 사랑의 다른 형태인 성욕, 소유욕, 희생정신, 이타심 등이 저마다 자기가 사랑인 것인 양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존중해 달라고 여기저기서 소리친다. 반면 행복은 마치 돈이나 명예를 좇으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획일화되어 간다. 사랑은 다양해지고, 행복의 길은 좁아진다. 육아에 있어서도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되 다양한 행복의 모습을 인정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