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래 이제부터 허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코인으로 돈을 잃게 된 허씨는 우울하다. 일을 하기가 싫고 멍하다. 그런 허씨의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정신과 진료를 권유했다.
정신과? 내가 정신과 환자라고?
허씨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날 일어났을 때 회사에 가지 않고 침대에서 밍기적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회사 근처의 정신과라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 앞에 있는 정신과에 점심시간을 이용해 방문했다. 이 정신과는 2시부터 점심시간이라서 회사 점심시간에 이용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회사 근처 정신과다 보니까 점심시간을 늦게 잡은 것 같았다. 그런데 자신 같은 사람이 많은지 점심시간에 예약 잡기가 정말 힘들었다. 특히 초진은 2달이 걸린다나? 그래서 결국 2달이나 기다린 끝에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정신과에서는 자신보고 적응장애라고 했다. 약을 지어준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신과 진료를 받고 나오면서 허씨는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막장이 되었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는데, 나는 돈 한 푼 모은 것이 없고 자가도 없는 월급쟁이 노예이자 정신과 환자다.
이렇게 모아서 내 집이나 살 수 있을까? 내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아니,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노후는 어떻게 하지?
이런 불안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허씨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정신과 의사가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뭔가 결정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지만 그냥 냈다. 어차피 이번에 우울한 것도 회사가 다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인사 고과가 좋지 않을 터였다. 승진도 안될 거고 더 이상 회사에 목숨 바쳐 일할 필요도 없다. 회사에서도 마침 코로나맞이 인원감축 붐이 불고 있던 터였다. 인사과에서는 자신의 사표를 금방 수리해 줬다.
회사에서 나오니 시간이 많아졌다. 자취방에 틀어박혀 몇 개월을 보냈다. 모아둔 3백만 원은 금세 바닥났다. 자취방을 빼고 집에 들어갔을 때 엄마가 퇴사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허씨가 힘들어 보였는지 뭐라고 하지 않았다. 집에서 집 밥 먹으면서 쉬다 보니까 허씨도 기운이 좀 났다.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엄마는 뭐라고 하지 않는데 꿔다논 보릿자루가 된 느낌이었다. 엄마가 등 뒤에 있을 때면 따가운 눈초리가 뒤에서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었다. 실업급여를 알아보고 나라에서 해주는 수업들을 찾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뭔가 준비하는 기분이었다. 나라에서 해주는 수업들이라 돈도 거의 들지 않았다. 이것저것 배우면서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생각해 본다. 허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너무 낯설었다. 나라에서 돈까지 내면서 배우라고 하고, 시간도 살면서 역대급으로 가장 많은 시기였는데, 막상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이 없었다.
결국 허씨는 그중 몇몇 과목을 신청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엑셀이랑 컴퓨터 그래픽 같이 쉬워 보이고, 그나마 필요해 보이는 과목들이었다. 낮에 학원이라도 다니니 뭐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수업을 지루했다. 마치 고등학교 컴퓨터 수업시간 같았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때는 선생님 몰래 알트 탭을 하고 스타크래프트를 했지만 지금은 알트 탭 할 필요도 없이 수업 중 집중이 안될 때면 그냥 스마트폰을 켠다. 그리고 웹툰을 보거나 인터넷 뉴스 기사를 하거나 각종 커뮤 글을 읽는다. 그러다 보면 수업 진도는 어느새 나가 있고 시간은 끝나있다. 그렇게 낮 시간을 보냈다.
3개월이 지났다. 그간 향상된 실력은 거의 없다. 학원비가 아깝지 않나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어차피 나라에서 대부분 내준다. 그러던 어느 날, 허씨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버지가 정년 퇴임한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정년 퇴임이 결정되던 날, 아버지와 함께한 술자리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항상 무뚝뚝하던 아버지.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허씨에게 이 나이 먹도록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게 살아왔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하였다.
허씨는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버지는 시대가 좋아서 직장이 있었고 허씨는 없다는 것 정도? 결국 같은 모습이 아닌가 생각했다. 허씨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설사 직장을 잡더라도, 그 직장이 끝나고 인생의 마지막 장을 살게 되었을 때, 아버지와 같은 고백을 아들에게 할 것만 같았다. 허씨의 아버지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고 했다. 허씨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정신과에 한번 더 가볼까?
물론 아버지와 같은 정신과에 다닌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손 잡고 정신과에 다닌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냥 아버지가 정신과가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하자, 본인에게도 도움이 될까 생각해 본 것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