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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온실 Sep 30. 2024

허씨의 첫 정신과 방문

7화

그런 허씨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난관에 부딪혔다. 일단 허씨의 생활 패턴이었다. 허씨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버지와 술자리를 할 때 잠깐 뿐이었고 허씨는 다음날부터 다시 게으른 패턴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학원과 집을 왔다 갔다 하고 학원이 끝나면 게임이나 깨작이던 허씨였다. 


 그런데 어느날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간판을 보게 된다. ‘ㅇㅇ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원래 없던 건물인 것 같은데, 새로 생긴 병원인 것 같다. 마침 저번에 아버지와 나누었던 이야기도 생각났다. 저번에 갔던 정신과도 괜찮기는 했지만 여기는 도심 한복판의 신축 건물인데 정신병원이 들어서 있었다. 대충 밖에서 인테리어를 봐도 고급스럽고 깨끗한 느낌이었다. 


상담을 위주로 하는 병원인가? 


허씨는 호기심이 생겨서 상가 안을 기웃기웃해 본다. 새로 생긴 병원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는 않아 보였다. 무슨 칸막이 같은 것들이 있어서 안에 대기하는 사람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시간도 많은데 한 번 들어가나 보자. 


허씨는 생각했다. 


 접수처에서 접수를 하고 15분 정도 기다렸을까? 한 사람이 나오고 허씨를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진료실로 들어간다.       


 “안녕하세요? 허OO님, 저는 정신과 의사 OO입니다. 오늘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을까요?”


허씨는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삶의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그렇다고 뭘 하는 것도 아니에요. 계속 그냥 되풀이하는 느낌이에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렇군요.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보게 되는 문제기도 하네요.”

 “정말요? 저는 저만 이렇게 사는 것 같았어요. 다들 자기 앞가림은 하면서 잘 살아가는데 나는 뭔가 싶고...”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허OO님, 누구나 하나쯤은 자신의 문제를 안고 가기 마련이고요, 또 어떤 시점에는 이런 고민을 하기 마련이지요. 허OO님에게는 지금이 그런 시점이고요.”

 “이런 고민을 일찍 했으면 진로를 정하거나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텐데 너무 늦은 것 같아서... 서른이 넘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까 정말 사회부적응자가 된 것 같고...”

 “꼭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만약 50살, 아니 60살이 넘어서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면 허OO님이야말로 젊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고 부러워할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렇긴 하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의사 선생님이 삶의 의미를 찾아주실 수 있나요?”

 “아쉽지만 의사가 환자의 삶의 의미를 직접 찾아드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도움이 되어드릴 순 있답니다. 혹시 어떤 것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아니면 뭘 하고 싶다거나, 강하게 열망한 적이 있나요?”

 “그게, 그런 게 딱히 없었어요. 그래서 문제인 거죠. 그걸 알면 삶의 의미도 알았을 테니까요.”

 “꼭 거창한 것일 필요는 없어요. 뭘 좋아했다거나, 삶의 어떤 영역에서라도 요.”

 “좋아했다... 이게 되게 웃긴 얘기긴 한데, 중학교 때였나, 게임을 할 때 게임 안에서 표창도적이라는 직업이 멋있게 보여서 따라서 키운 적이 있었어요. 그때 진짜 열심히 했었죠. 그래서 막상 표창도적으로 정점까지 찍고 나니까, 딱히 뭔가 허무하더라고요. 그래서 게임을 접었어요. 그때 생각했죠. 뭔가 원해서 되고 나면 그다음은 없구나. 허무하구나.”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뭔가 되는 것은 허무하기만 했나요?”

 “그...랬지만 그런 건 있었어요. 그 키우는 순간은 되게 재밌었어요. 막상 허밋이라는 직업을 이뤘을 때보다, 아 허밋은 게임 직업 이름이에요. 그 직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퀘스트를 깨고 육성하는 순간이 재밌었던 것 같아요.”

 “그렇죠. 우리 삶도 그것과 비슷하답니다. 허OO님이 지금 당장 되고 싶은 것은 없을 수 있어요. 그런데 하면서 즐거운 것도 없나요? 우리 삶은 우리가 하는 것들의 총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 안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많이 끼워 넣는 것부터 시작해야 되어요. 허OO님이 좋아하는 할 일은 무엇인가요?”

 “저는... 그러니까...”      


 허씨는 말문이 막혔다. 막상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려니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뭘 좋아했지? 게임은 좋아했지만 그런 걸 말하라는 자리는 아닌 것 같았다. 허씨가 머뭇대고 있자 정신과 선생님이 말을 이어갔다. 


 “그럼 이렇게 해볼까요? 다음 시간까지 허OO님이 좋아하는 일들을 알아오는 거예요. 좋아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괜찮아요. 앞으로 일주일을 살아가면서 한 번 생각해 보면서 그때그때 기록해 보는 거예요.”

 “네. 한 번 해볼게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오늘 여기까지만 한 것도 한 발짝 나아간 거니까 너무 급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잘하고 있는 거니까요. 오늘 약은 없고요. 진료비만 수납하고 가시면 되어요.”

 “네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잘 가고 다음 주에 봐요~”                    

               

 허씨는 진료실을 나왔다. 정신과 약을 먹으면 정신이 대략 멍해진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약도 처방하지 않았다. 진료비도 생각보다 쌌다. K-의료보험의 힘일까. 어쨌건 허씨가 생각하던 정신과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깔끔한 인테리어,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대기공간, 은은한 향기와 접수창구에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 카페에 와서 상담만 받고 가는 느낌이었다. 이전에 정신과에 갔을 때는 너무 힘든 상태였어서 그런 것을 느낄 틈도 없었는데, 허씨는 별다른 처방을 받지 않았지만 우울했던 기분이 다소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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