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런 기분은 일주일이 지나면서 다소 안정이 되었지만, 허씨는 다시 정신과에 가기 두려웠다. 그래서 집에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게임을 한 지 3주가 지났을까. 매일 게임을 하다 보니 게임 속 캐릭터는 어느새 강해져 있었다. 그런데 강해진 만큼 강해진 몬스터를 잡아야 되다 보니 오히려 성장 속도는 느려졌다. 게임이 재미 없어졌다. 허씨는 생각했다. 인생이나 게임이나 뭐 하나 쉬운 게 없구나. 게임 속 캐릭터가 처음에는 쉽게 컸는데, 레벨이 오르고 강해지다 보니 그만큼 또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 게 마치 현실 같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는, 그냥 공부만 좀 해도 세상이 쉬웠다. 그런 허씨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세상이 더 쉬워질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그게 아니었다. 어른이 되니까 그만큼의 무게가 더 가해지는 것이었다.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었다. 게임은 현질이라도 하면 되는데, 현질 할 돈도 현생엔 없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허씨는 용기를 내서 다시 정신과에 방문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 네 좀 일이 있어서.”
“아 그러셨군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지내는 건 똑같죠. 그냥 뭐 집에 있고. 게임하고.”
“그랬군요. 게임. 게임하면서 지내셨구나.”
“네 근데. 뭐랄까. 게임도 이제 별로 재미가 없어요. 게임 캐릭터 키우기도 다 똑같이 어렵고. 게임이나 인생이나 다 똑같은 거 같네요.”
“허OO님은 인생이 어렵다고 생각하나요?”
“당연하죠. 인생이 원래 어려운 거 아닌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죠?”
“그냥 실제로 어려우니까요.”
“흠. 실제로 어렵다는 건 어떻죠. 예를 좀 들어주세요 어떤 부분이 어려운지.”
“그렇잖아요.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돈 버는 게 쉽나요. 한 달에 2,300 벌어도 집 사기도 어렵고. 집이 있어야 살아가잖아요. 안 그러면 맨날 그날 벌어서 그날 먹고사는 것 밖에 없는데 희망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려운 거죠. 버는 족족 다 쓰니까.”
“그렇군요. 돈이 없어서 어렵다. 인가요?”
“돈이 없으니까 희망이 없죠.
“희망이 돈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죠. 저뿐만 아니라 다 그렇게 생각할걸요. 요즘 사람들 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코인이나 이런 거에 매달린다고 생각해요. 그게 오를 거라는 희망이 있잖아요. 월급은 희망이 없으니까. 근데 뭐. 해보니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더라고요. 유튜브 보면 어떤 사람은 소액으로도 큰돈을 잘만 벌던데 실상은 그것도 쉽지 않은 거더라구요.”
“코인을 하다가 힘든 적이 있었나 봐요.”
“있었다 마다요. 희망을 찾으려고 한 건데. 남은 건 절망 밖에 없더라구요.”
“그럼 허OO님은 지금 삶이 돈이 없으니 절망 밖에 없다고 생각하나요?”
“그렇죠.”
“돈 말고 다른 측면을 보면요?”
“돈 말고 다른 측면이요?”
“인생에는 돈 말고도 다른 여러 측면이 있잖아요.”
“다른 건 딱히 생각해 본 게 없는데...”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음. 일단 젊은 편이긴 하고. 건강도 뭐 몸은 건강한 편이고, 정신은 이렇지만. 그리고 또 가족들도 뭐 큰 문제없는 편이긴 하죠.”
“그렇네요.”
“그렇게 생각해 보니 썩 나쁜 인생 조건은 아닌 것 같긴 해요. 그래도 선생님, 저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어요. 돈이 있어야 더 밝은 미래를 꿈꾸는데.”
“밝은 미래라... 근데 앞뒤가 바뀐 것 같아요.”
“앞뒤가 바뀌었다고요?”
“네. 돈이 있어서 밝은 미래를 꿈꾼다. 밝은 미래를 꿈꾸면 돈이 따라온다.”
“선생님. 꿈으로 돈을 버는 시대는 지난 거 같아요. 그건 1980년대 얘기 아닌가요?”
“과연 그럴까요?”
“네 선생님. 세상이 꿈으로만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허OO님은 꿈을 꾼 적이 있나요?”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 있죠. 게임할 때, 표창도적. 그 꿈이 이루어지긴 했어요. 멋진 표창 도적이 되었었죠. 그게 이루어지긴 했네요. 근데 인생은 게임이랑 다르잖아요.”
“맞아요. 인생은 게임이랑 다르죠. 하지만 게임이랑 비슷한 부분도 많이 있답니다. 그리고 꿈의 측면에서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바가 있어야 그곳에 갈 수 있어요. 아니면 대양을 표류하는 나룻배에 지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나침반이에요.”
“나침반이라...”
“허OO님은 인생의 나침반이 있나요?”
“아니오. 예전엔 그게 돈이었던 것 같은데, 코인이랑 직장이랑 다 말아먹은 뒤에는 나침반이 없어진 느낌이에요.”
“그럼 그걸 한 번 다시 찾아보는 것부터 시작해 봐요.”
“나침반이요?”
“목표. 삶의 희망, 꿈 말이에요.”
“꿈이라.”
“비전이라고도 하는데, 눈에 보이듯이 생생한 어떤. 예전에 표창도적 목표처럼 말이에요. 그걸 인생에 대입해 봐요.”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말이죠? 한 번 생각해 볼게요.”
“네 그러면 다음 시간까지 한 번 생각해 보는 걸로 하죠.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네 선생님. 오늘 오래간만에 왔으니 다음번에는 시간 지켜서 올게요.”
“그러면 좋겠네요(웃음)”
허씨는 대기실에 앉아서 생각했다. 내가 그리는 모습이라. 확실히 지금 나의 생활 모습은 내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그런 모습을 생각하자니 머릿속이 뭔가 막막한 느낌이었다. 내가 뭘, 도대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 목표를 정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