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허씨의 그런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고 허씨가 병원에 가기 3일 전, 허씨는 의사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허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적었다. 허씨의 기록은 다소 솔직했다. 여기 허씨의 의식에 흐름에 따라 쓰인 기록을 보자.
나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일까?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나는 예쁜 여자를 만나 좋은 가정을 이루어서 잘 살고 싶다. 나는 예쁜 여자랑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근데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돈을 많이 벌면서 좋은 순간은 회사에 다녔을 때? 차곡차곡 돈이 모이는 게 좋았다. 그래 나는 돈을 벌면서 예쁜 여자랑 가정 꾸리고 사는 걸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살면 행복하겠다.
허씨는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고 정신과에 다시 방문했다.
“허OO님. 일주일간 잘 지내셨나요?”
“네. 그럭저럭 지냈어요.”
“네. 지난번에 우리가 얘기하던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네. 그거 한 번 적어와 봤어요. 막상 말하려니까 부끄럽네요. 여기”
허씨는 자신이 적은 쪽지를 건넸다.
“음 그렇군요. 예쁜 여자랑 가정을 이루고, 돈 버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부터 얘기해 볼까요?”
“돈 버는 거요. 일단 지금 상태에서 바로 예쁜 여자랑 사는 건 힘들 것 같고. 어떻게 돈 벌지부터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요 돈 버는 것 말이죠. 허OO님은 왜 돈을 벌고 싶으신 거예요?”
“예쁜 여자랑 가정을 이루고 결혼해서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울에 집도 있어야 하고, 좋은 차도 있어야 하고. 그래야 예쁜 여자가 저를 돌아봐 줄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죠?”
“음. 이건 좀 부끄러운 얘긴데.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근데 그 친구가 환승을 하더라고요. SNS를 몰래 봤는데 변호사? 인 것 같았어요. 그때 생각했죠. 아 여자들은 다 이렇게 전문직, 돈 많은 사람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커뮤에 올라오는 글 봐도. 여자들이 다 직업에 따라, 돈에 따라 줄 세우고. 사는 곳 급지 나누고 그렇게 산다고.”
“허OO님은 모든 여자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그럼 반대로, 허OO씨는 돈은 많은데 나이 많고 성격 괴팍한 여자랑 결혼하고 싶을까요?”
“에이 그거랑 다르죠. 그러니까 같은 조건이면, 돈이 많으면 좋다 이런 거지 그런 사람이 어딨 어요.”
“그렇죠. 제 말이 그거예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이면 사람은 좋아하기 어렵죠.”
“아 그렇군요. 그럼 꼭 돈이 많다고 해서 예쁜 여자랑 결혼할 수 있는 건 아니네요.”
“맞아요.”
“선생님, 그럼 예쁜 여자랑 결혼해서 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진짜 그러면 행복할 것 같아서. 방법 좀 알려주세요.”
“음, 그러면 말이죠. 예쁜 여자랑 결혼해서 사는 게 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허OO님의 생각부터 들어볼까요?”
“예쁜 여자는요. 같이 있기만 해도 행복해요. 남들이 막 옆에서 쳐다보고 부러워할 것 같고. 실제로 제가 봐도 예쁘고 좋고. 뭐든지 다 해줘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막 퍼줘도. 너무 예쁘니까. 그리고 아이들도 예쁘겠죠.”
“그래도. 다른 이유들은 그렇다 치고, 남들이 부러워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나요?”
“네. 남자라면 원래 그런 폼나는 인생을 살고 싶잖아요. 다른 수컷들이 부러워하는.”
“그럴까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고 싶은 로망이 있는 것 같네요.”
“네 맞아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러고 보니까 돈도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사실 회사 다닐 때 급여로도 꽤 받긴 했었거든요. 그냥저냥 모아서 생활할 수준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어요. 근데 그걸로는 부족했던 것 같아요. 차도 내릴 때 하차감 쩌는 걸로 사고 싶었고. 집도 서울에 있는 한강뷰...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서울에 집 한 채도 사고 싶었고. 여자도 그런 여자랑 결혼해서 번듯한 가정 차리고. 그렇게 사는 게 꿈이었던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그러면 인정해 주니까. 아. 다른 사람들이.”
허씨는 그때 알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 맞춰 살고 있었다는 것을. 정신과 의사도 그걸 캐치한 것 같았다. 허씨는 잠깐동안 말이 없이 멍하니 있었고, 의사는 기다렸다 말했다.
“오늘 얘기하면서 또 느낀 바가 있었을 텐데. 다음 시간에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오늘 여기까지 말하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고요. 다음 주에 또 뵐게요.”
“네.”
허씨는 진료실을 나왔다. 수납을 하기 전까지 앉아서 생각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실은 남들이 보기 좋은 것이었구나. 그럼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무얼까? 허씨는 자신이 없었다. 남들에게 맞춰서 살았던 지난 30년간의 인생이 모조리 부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새로운 뭔가를, 내가 진정을 원하는 뭔가를 찾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