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4년 미국 초판)이란 저서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알려졌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과 함께 전 세계에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다.
홀로코스트의 최종 결정자였던 아이히만의 무사고와 악의 평범성, 엄청나게 중대한 죄에 비해 너무나 평온한 평범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무엇이 그를 그렇게 생각 없이, 극악무도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게 하였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자신은 죄가 없다는 아이히만의 주장을 듣고는 아렌트는 경악을 한다. 이에,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고 쓴다.
아이히만의 논리는 친일파와 똑같다. 그때는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도 아이히만인 것이다. 직장을 위해서 일제에 협력한 것이라는 논리는 아이히만의 말과 판박이다. 게다가 아이히만은 무죄를 주장하면서 자신은 독일을 위해서 상부의 지시를 충분히 잘 따르고 그 일의 효율성을 위해 노력하였기에 오히려 국가의 일을 열심히 한 사람이라는 논조의 주장을 한다. 이 말은 당시 재판장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트렸다.
어떻게 600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을 학살한 주범이 저렇게 죄가 없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옆집 아저씨처럼 따뜻한 표정과 얼굴을 가졌으며 그 많은 살인을 집행할 수 있었던가?
친일을 한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우리는 나라가 독립이 될 줄 몰랐다.” 라거나 해도 소용없는 독립운동보다 먹고사는 일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라가 독립이 되지 않고 먹고살기 힘들었으므로, 나라를 팔아도 되고 같은 동포를 학살하거나 전장으로 내 몰아도 된다는 말인가?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생각 없이 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 재고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이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악한 일인지, 악한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사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사진- 아돌프아이히만의 재판장면)
아렌트는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유태인 학살과정이 사람들에게 가르쳐준 것으로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 사고 없이 행하는 일의 평범성을 통렬하게 지적하였다.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언어규칙으로 ‘우회적인 언어표현’은 직설적으로 ‘학살’ ‘살인’이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일상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장이 없도록, 정신적인 충격이 없도록 나름대로 배려?를 하였다고 한다.
대량학살은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취급’으로 표현하였고 유대인 이송작업은 ‘재정착’, ‘동부 지역노동’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으로 현실 감각을 마비시켜 죄책감을 없애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우회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할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살펴서 사용하여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감각을 마비시킨다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하지 않는 것은 커다란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아렌트는 이 책을 쓰기에 이른다. 이를 성차별과 관련지어 생각해 본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아무 생각 없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간과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사고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다.
일제강점 당시에 한국인을 학살하거나 전장으로 내모는 일에 같은 동포인 한국인이 동원되어 더욱 악랄하게 집행하였다는 것은 바로 우리나라에도 아이히만과 같은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문단에서도 나타난 현상이며, 지난 2019년에는 미당문학상이 폐지되기도 하였다.
친일을 하거나 친미를 하면서 민중을 억압하거나 총질을 하였다면 그것은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미화하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 없음, 무사고는 우리 사회를 병든 채로 이끌어가는 것이며 절단하지 않으면 온 사회를 좀먹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을 동료로 여기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 여기며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하여 보육이나 헌신과 희생을 도맡아 해도 괜찮다는 무사고는 강력한 재고의 필요성을 대두하게 한다.
여성을 여성으로 여기지 말고 동료로 여기는 생각이 필요하다. 어딜가나 여자, 여성이기에 제한된 사회의 생각과 제한된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고 성적 정체성을 겪어야 한다. 이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단지 여성이라는 옷을 입은 것뿐, 하나의 존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