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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Oct 22. 2023

첫차와 운전 연습

강릉 <테라로사 커피공장>

대학을 졸업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것이었다. 남들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운전면허학원부터 등록한다던데, 여기서 더 미루다가는 영영 운전과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자격증시험은 한 번에 합격했지만, 선뜻 자동차를 구매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켜보던 엄마가 구매비용을 지원해준다고 했는데도 거절했다. 주차도 못 하는 왕초보 운전자가 도로에 나갔다가 큰 사고라도 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차가 없으니 연습을 하지 못했고, 저절로 운전 실력이 좋아지는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대로 장롱면허가 되고 만다.




운전을 다시 시작한 건 유와 연애한 지 일 년쯤 지났을 때였다. 당시 유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서울에 취직했고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림살이를 정리하면서 한 가지 고민거리가 생겼다. 유는 아버지께 물려받은 오래된 SUV를 한 대 가지고 있었는데, 서울에는 주차장이 없어서 가져가기 곤란하다고 했다. 원룸 주차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집을 비교적 저렴하게 계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차를 판매하거나 폐차를 하면, 우리가 좋아하는 차박 캠핑 같은 건 더는 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결국, 여전히 강릉에 남아있던 내가 자연스럽게 차를 맡아 관리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유가 남긴 흰색 SUV는 나의 첫차가 되었다.


운전을 다시 시작했던 초반에는 면허를 취득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운전방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연습 첫날에는 액셀과 브레이크 위치도 헷갈릴 지경이었으니 운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잊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주차는 고사하고 운전조차 할 줄 모르는 태초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내가 살던 동네가 도시의 외곽으로 차량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한산할 때는 유와 함께 도로주행연습을 했고, 퇴근하고 나면 매일 동네 한가한 주차장으로 차를 끌고 가서 주차 연습을 했다. 그렇게 자신감이 붙어 혼자 마트도 다녀오고 바다를 보러 남항진 해변까지 왕복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나는 돌연, 카페 〈테라로사 커피공장〉을 혼자 운전해서 다녀오겠다며 결심하기에 이른다.




〈테라로사 커피공장〉은 예전부터 직접 로스팅을 했고 원두의 품질이 좋다고 소문이 났던 카페였다. 속초에서도 “테라로사 원두를 사용한다”라며 마케팅하는 매장이 있었으니, 본점을 찾아가 마시지 않아도 이미 검증된 맛이었다. 강릉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지인분들의 소개로 지점은 한두 번 방문해본 적 있었지만, 직접 운전해서 본점을 찾아가는 건 처음이었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내가 살던 동네에서 차로 15분이면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여태껏 운전해서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억울할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나는 퇴근하자마자 저녁밥을 급하게 먹고선 소문의 카페를 찾아 운전대를 잡게 된다. 시골 마을의 굽은 길이었지만 괜찮았다. 직장동료들과 낮에 점심 먹으러 가끔 지나가던 길이어서 눈으로 익혀두었기 때문이다. 뉘엿뉘엿 해는 지고, 좋아하는 인디음악을 틀어놓은 채 운전하는 기분이 꽤나 산뜻했다. 해가 져서 좀 어둡긴 했지만 도로에 차가 거의 없어서 초보운전답게 느릿느릿 여유를 가지며 운전해도 괜찮았다는 점이 오히려 안심됐다. 카페에 도착하고 주차를 할 때까지도 기분이 좋았다. 평일 저녁에 오니 주차공간도 널널하다며 행복해하던 나는, 곧이어 ‘퉁’ 소리와 함께 그대로 굳고야 만다. 어두운 밤에 후방주차를 하다가 그만 허벅지 높이의 낮은 돌담을 보지 못 하고 그대로 부딪힌 것이다. 나는 유에게 자진 납세하며 전화를 걸었다.


“담벼락은 어때? 혹시 부서졌어?”

“아냐, 살짝 닿은 거라 다행히 멀쩡해. 근데 우리 차에 찍힌 자국이 있는 것 같아.”

“그럼 괜찮아. 차는 걱정하지 마.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


초보운전자는 한껏 소심쟁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유의 친절한 말과 자신의 어이없는 실수를 곱씹으며 커피를 마셨던 기억. 야속하게도 그날따라 매장이 한가롭고 커피 맛도 좋았다. 카페 〈테라로사 커피공장〉의 본점 방문은 그렇게 어이없는 실수와 함께 저물어갔다.




이후에도 울적하거나 외로운 마음이 드는 날에는 퇴근 후에 카페 〈테라로사 커피공장〉을 찾아갔다. 두 번 실수할 수는 없었으므로 항상 주차에 신경 썼고, 어떤 날은 아예 담벼락이 없는 노지 쪽에 주차하기도 했다. 주말에는 오전에 방문하더라도 이미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와서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했다. ‘강릉의 카페가 이렇게나 유명했던가?’ 생각했을 땐 이미 서울 한복판에도  〈테라로사 커피공장〉 지점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인연이 생기면서 카페는 더 친근해졌다. 친척 동생 제이가 언젠가 여기에서 아르바이트했는데, 아무나 커피를 내릴 수 없고 바리스타 자격을 가진 전문가들만 채용해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자격을 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제이 같은 평범한 아르바이트생은 설거지하거나 매장 정리 업무만 한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어쩐지 핸드드립 커피가 평소와는 다르게 풍미가 있고 향이 깊은 것도 같았다. 대뜸 쓰기만 하지도 않고, 적당한 산미와 적당한 탄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원두 종류도 많아서 매번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심지어 디저트도 맛있었다. 최근에는 빵이나 베이커리류도 많아졌지만, 역시 〈테라로사 커피공장〉의 근본은 치즈케이크나 피칸 타르트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치즈케이크였다. 다른 곳보다 치즈 맛이 더 진하고 커피와 잘 어울린다. 저녁에 가면 낮보다 손님이 적어서 비교적 한산하다는 게 좋기도 했다. 낮에 방문할 때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은 강릉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하면서, 예전 그때처럼 아무 때나 카페 〈테라로사 커피공장〉에 찾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 커피 향과 맛이 그리울 때면 강릉에서 소중히 가져온 원두를 찬장에서 꺼내 내려 마시곤 한다. 나에게 〈테라로사 커피공장〉의 커피는 그리운 강릉의 맛이자 바다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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