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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Oct 22. 2023

첫 아르바이트와 에스프레소

지금은 사라진, 속초 <빈스앤베리즈>

시험 기간이면 밤늦게까지 공부하면서 카페인을 달고 사는 대학생으로 진화했지만, 나는 여전히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지 않는 ‘커알못(커피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나에게 아메리카노는 여전히 쓰기만 한 검은색 액체로 느껴졌고, 카페에 가더라도 녹차라테나 고구마라테 같은 달콤한 음료를 주문하곤 했다. 어쩌다 한번 커피를 마시더라도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카페모카 정도만 가능했는데, 그것마저도 커피의 쌉싸름한 맛이 느껴져서 자주 마시진 않았으니 커피와는 거리가 먼 청년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커피’의 ‘커’ 자도 모르던 내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건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그맘때의 나는 바리스타 언니 오빠들에게 환상을 갖고 있었는데, 단정한 유니폼을 갖춰 입고 우아한 자세로 척척 커피를 내려주는 모습이 어린 나에겐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드라마의 영향도 컸다. 카페에서 일하면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처럼 멋진 사람들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심한 삶에 한 스푼 낭만이 가득할 것만 같은 기대도 있었다.


그해 여름에는 꼭 카페 아르바이트를 구하겠다고 다짐하며, 기말고사가 모두 끝나기도 전부터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했더랬다. 하지만 대부분 단기 아르바이트생은 받지 않는다거나 경력자만 채용한다며 거절했다. 올해도 역시 아르바이트는 물 건너갔구나, 하며 포기할 때쯤 지역신문에서 한 채용공고를 발견하게 된다. ‘신입도 지원 가능’하다고 적혀있던 문구가 한 줄기 빛처럼 선명했던 그곳. 바로 내가 근무했던 카페 〈빈스앤베리즈〉였다.




카페 〈빈스앤베리즈〉는 워터파크 내에 위치한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었다. 지금은 다른 프랜차이즈로 바뀌면서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매장을 3개로 확장할 만큼 손님도 많고 인력도 많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때까지 나는 카페 아르바이트는 고사하고 다른 아르바이트 역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사장님들은 대부분 전화로 몇 가지 정보만 짧게 묻고선 면접조차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 점장님께서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 않고 일단 카페로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두 손에 이력서를 쥐고 떨리는 마음으로 카페로 향했다.


“스케쥴 근무여서 출퇴근 시간도 매번 다르고 휴무도 일정하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요?”


점장님은 나의 출신 고등학교와 재학 중인 대학교 이름을 빼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이력서를 들여다보며 말씀하셨다. “네, 그럼요. 무조건 됩니다!”하고 간절히 외치고 싶었으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 근처에 워터파크 직원 전용 버스 정류장이 있고, 혹시 버스를 놓치더라도 워터파크까지 오는 직행 버스가 다니기 때문에 괜찮다고도 어필했다. 점장님은 고민하다가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말만 남긴 채 면접은 종료됐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창밖 풍경을 아련하게 바라봤던 기억. 나는 대학 입시 때도 면접 전형 없이 합격했기에 이번 아르바이트가 내 생에 최초의 면접 경험이었는데, 어쩐지 짧고 어색한 면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면접이란 원래 이렇게 별것 없는 거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히 합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전교육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렇게 인생 첫 아르바이트가 시작되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손님으로만 방문했던 워터파크를 아르바이트생으로서 출입하는 일은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카페 소속이었지만 동시에 워터파크 직원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카페와 달랐다. 출퇴근을 할 때 일반 고객용 출입구가 아니라 직원 전용 입구로 돌아서 들어가야 했다. 탈의실은 워터파크의 모든 매장 직원들과 함께 썼는데, 그중에는 내 이름이 적힌 사물함도 있었다. 〈빈스앤베리즈〉 로고가 새겨진 카페 전용 유니폼과 모자도 지급 받았다. 특히 유의사항이 있었는데, 식음료매장 직원들은 반지나 목걸이는 물론이고 귀걸이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주기적으로 워터파크 직원교육도 수료해야한다고 했다. 점장님은 카페 본사 규칙과 워터파크의 자체 규칙을 모두 잘 지켜야한다며 신신당부했다.


사전교육은 서울 본사에서 직원이 내려와 직접 가르쳤다. 해외 유명 바리스타 대회에서 수상한 실력자라고 했다. 교육 대상자는 신규 아르바이트생(이하 ‘알바생’) 6명. 다들 원두커피를 한 번도 내려본 적이 없는 왕초보였다. 그는 햇병아리 알바생이었던 우리를 모아놓고 원두 추출하는 방법과 우유 스팀 방법을 교육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바리스타님이 내려주신 원두커피가 그때까지 마셨던 커피 중에 가장 맛있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에스프레소를 그대로 마셨는데도 괜찮았다. 그는 원두 추출 방법을 알려주면서 직접 내린 커피를 시음해보도록 권했는데, 에스프레소에 백설탕을 한가득 넣은 쓰디쓴 커피가 그날만큼은 이상하게도 고소하고 풍미가 넘쳤다. 여태껏 커피는 쓰디쓴 검은색 물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그날 산산이 깨졌다. 커피는 생각보다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 그리고 전문가가 만들면 더 맛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우유 스팀도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또 알게 되었다. 우유 거품을 제대로 내면 거칠지 않고 뽀얗고 고운 작은 거품들이 가득하다는 것, 그리고 진정한 바리스타는 우유 스팀 할 때 나는 소리만 듣고도 잘 만든 거품인지 알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증기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난다는 건 거품이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너무 우유 거품을 오랫동안 만들면 비린내가 나고 풍미가 나빠진다고 했다. 그때 배운 내용은 지금까지도 남아, 새로운 카페를 갈 때 커피의 맛을 가늠하는 용도로 종종 사용하곤 하니 처음에 잘 배우면 도움이 된다는 옛말이 틀리진 않은 것 같다.




양질의 교육을 받고 다음 주부터 현장에 투입된 우리는 각자 적응해나가며 한 사람의 몫을 해냈다.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 우유 스팀 연습도 틈틈이 하고, 원두를 얼마나 넣으며 어느 정도의 강도로 탬핑해야 하는지 등을 꾸준히 연구해나갔다. 요즘 카페는 전자동기계가 많이 들어와서 원두의 양도 일정하게 뽑아준다고 들었는데, 그 시절에는 그저 아날로그의 힘을 빌려 스스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점장님의 배려 덕분에 나는 매일 출근 직후 원두 추출과 우유 스팀 연습을 하고, 완성된 커피도 한 잔씩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커피 입맛은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도 예전처럼 못 마실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커피는 여전히 카페모카였기에, 첫 일 주일 정도는 초콜릿 시럽을 가득 넣고 휘핑크림까지 야무지게 올린 커피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도 차츰 물리기 시작했다. 휘핑크림이 너무 달아서 도저히 못 먹을 지경에 이르렀고, 그다음에는 초콜릿 시럽도 넣지 않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고 일에 익숙해졌을 때쯤에는 아메리카노도 지겨워서 생수만 벌컥벌컥 들이키는 내가 있었다. 샷이 하나 남았으니 커피 한잔 더 마셔도 된다는 점장님의 말에 내가 두 손을 내저으며 거절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렇게 두 달간의 카페 아르바이트는 즐거운 추억을 남기며 아름답게 종료되었다. 그때 커피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체득한 경험은 이후에도 오래 남아, 나의 커피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고, 예전엔 싫어했던 아메리카노를 물처럼 마시는 사람으로 변했다. 원두커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 가서는 에스프레소를 하루에도 몇 잔씩 꿀떡꿀떡 넘길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새로운 지역을 탐방할 때마다 로컬 카페를 찾아 헤매고, 그곳에서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맛보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도 그때의 기억 덕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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