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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Oct 22. 2023

아메리카노와 강렬한 추억

속초 <커피휘림>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2010년쯤은 속초에도 카페가 하나둘 생기던 때였다. 속초 시내에도 최신 스타일의 개인 카페가 들어서는가 하면, 직접 로스팅하고 케이크를 만들어 판매하는 카페도 등장했다. 2007년 전국을 휩쓸었던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영향으로 ‘카페’라는 장소와 ‘바리스타’라는 직업에 낭만이 만연하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교복을 입고 카페에 드나든다는 건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요즘은 카페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지만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에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청소년도 거의 없었다. 카페는 어른들이 모여 세련된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 나누는 장소라고 여겼다. 당시 속초에서 가장 유명했던 카페 〈커피휘림〉에 한 학생이 엄마와 함께 방문했다가 학교 선생님들을 왕왕 만났다는 소문이 돌면서, 내게 카페는 더더욱 갈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열아홉의 나는 카페 〈커피휘림〉의 통창 너머로 둘러앉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짐하게 된다. 수능이 끝나고 어른이 되면 저 카페에 가보고야 말겠다고 말이다.




그 바람대로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당당히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마침 손님도 많지 않은 한가한 오후. 우리는 경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둘러앉았다. 그때만큼은 비로소 이런 멋진 장소에 올 만큼 어른이 되었다는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함께 간 친구 중 누구도 선뜻 메뉴를 선택하지 못했다. 커피 이름이 너무 어렵고 생소했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같은 단어를 그때 처음 봤다. 뭐가 어떻게 다른 건지, 어떤 커피가 맛이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가격도 생각보다 비쌌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금방 해결됐겠지만, 그땐 그런 최신 문물이 없었고 모두 폴더폰을 사용했기에 ‘인터넷 찬스’ 같은 건 쓸 수 없었다. 정적을 깨고 가장 먼저 운을 뗀 사람은 친구 은이었다.


“나는… 에스프레소 마실게.”

“안돼!”


내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은이를 말렸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에스프레소는 마시면 안 된대. 양도 적고 엄청 쓰대.”


엄청나게 작은 잔에 사약 같은 커피가 한모금거리로 나온다고 했다며 이유를 설명하자, 은이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그것까진 미처 상상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은이는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할 것처럼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 실은 에스프레소가 가장 저렴해서 골랐어.”


우리는 결국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분께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우리의 대화를 일찍이 듣고 있던 직원분께서는 에스프레소는 원액이라 쓸 거라고 설명하며, 거기에 물을 타서 만든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라고 추천해주셨다. 나는 커피 위에 달달한 휘핑크림이 올라간 카페모카를 요청했고, 다른 친구들도 각각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료를 하나씩 주문했다.


잠시 후 직원분께서는 우리가 주문한 커피를 직접 테이블로 가져다주셨다. 아메리카노, 카페모카, 녹차라테 같은 다양한 음료가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색깔도 알록달록 다양한 커피와 음료 앞에서 우리는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인터넷에서만 보았던, 하얀 크림 위에 초콜릿 시럽이 예쁘게도 올라간 카페모카를 소중히 쥐고 호록호록 마셨다. 진한 초콜릿 맛과 달콤한 크림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은이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커피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왜 그러냐 묻는 내게, 은이는 말없이 자신의 커피잔을 내밀었다.


“마셔볼래?”


궁금한 마음에 한 모금 받아마셨다가 느낀 충격적인 맛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뭐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메리카노가 쓰다는 소문은 일찍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른들은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지? 어른이 되면 쓴맛을 느끼는 감각이 사라지는 걸까? 나의 반응을 지켜보던 옆자리 친구도 아메리카노에 도전했다가 경악한 얼굴을 했다. 은이가 어색하게 허허 웃었다. 다른 친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은이를 바라봤다.


“……내 것도 같이 마셔.”

“괜찮아. 그래도 고마워.”




그날 우리는 생애 처음 방문한 카페에서 커피를 나눠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곧 대학에 입학하는 설렘과 수능이 끝난 수험생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 어딘가로 멀리 떠나고 싶은 욕구 같은 것들이었다. 그땐 앞으로 펼쳐질 어른으로서의 삶에 기대가 가득했다. 물론 이번처럼 새로운 것에 도전했다가 실패할 때도 있겠지만 말이다.


한참이나 수다를 떨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쯤에는 카페라는 공간에 조금 익숙해진 것도 같았다. 다음에 오면 더 능숙하게 주문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는 실수로도 얘기하면 안 되는 숨겨진 폭탄 같은 존재로 남았다. “소주가 달다”라는 어른들의 말만큼이나 “아메리카노가 맛있다”라는 이야기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위라고 생각했다. 은이는 그래도 자신이 주문한 커피이니 마셔보겠다며 열심히 아메리카노를 홀짝였지만, 결국 절반 이상 남기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큰 불평 없이 묵묵하던 은이는 그날 카페를 나와서야 진짜 심경을 토로했다.


“다음부턴 절대 아메리카노 안 마실 거야!”


카페 〈커피휘림〉에서 처음으로 원두커피를 도전했던 우리의 사연은 그렇게 웃기고도 슬프게 마무리되었다. 이후에도 친구를 만날 때마다 몇 번이나 카페를 방문했고, 화제가 대학 생활이나 첫사랑같이 좀 더 성숙한 내용으로 변해갔지만, 그날 모였던 우리 중 누구도 결국 아메리카노와 친해지지 못한 채 스무 살은 끝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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