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씨엘커피>
처음 강릉에서 살게 된 계기는 대학교 때문이었다. 이십 년 가까이 속초에서만 지내던 시골 소녀가, 스무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다른 지역으로 진출했던 것이다. 비록 기숙사에서 지냈고 통금시간도 지켜야 했지만, 그땐 집을 떠나서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더랬다.
무엇보다 강릉에 살아서 좋았던 점은 학교 정문에서 어떤 버스를 타더라도 안목 해변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경포 해변도 물론 멋있지만, 나는 안목 해변의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더 좋았다. 작은 해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공기를 사랑했다. 방파제를 지나 빨간 등대까지 가는 산책길도 매력 있었다. 훗날 안목항에서 울릉도와 독도로 향하는 배도 탔으니, 나에게 안목 해변이란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장소였음이 분명하다.
지금이야 강릉에서 매년 커피 축제를 개최하고 안목 해변에도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가 많이 생겼지만, 내가 스무 살 때는 그렇지 않았다. 해변을 따라 대부분 횟집이나 조개구이집이 즐비했고 그사이에 유명한 카페가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그런데도 ‘안목 카페거리’라고 불렀던 이유는 안목 해변 초입에 있는 커피 자판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다가 잘 보이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커피 자판기에서 밀크커피 한잔 뽑아 마시며 바닷바람을 느끼는 낭만이 그때는 있었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나는 추운 걸 싫어했고 몸을 녹일만한 자동차도 없었기 때문에 카페를 찾아다니기 바빴다. 당시 유명했던 카페는 지금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엘빈커피〉나 〈커피커퍼〉 같은 매장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맘때쯤 새로 오픈한 〈씨엘커피〉를 자주 가곤 했다. 당시 내 기준으로는 〈씨엘커피〉의 화이트톤 인테리어가 가장 도시처럼 세련됐었고, 또 커피 말고도 여러 가지 음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나는 아직 커피를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리 원두가 기가 막힌 카페를 찾아간들 소용이 없었다. 항상 녹차라테나 요거트 스무디 같은 음료를 주문했고, 가끔 멋을 부리고 싶은 날에만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카페모카를 마셨다. 그 당시 나에게 카페란 커피를 마시는 장소라기보다는, 멋진 공간에서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맛있는 음료와 케이크를 먹는 장소의 의미가 강했다.
〈씨엘커피〉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바다가 가까이 있어 잘 보인다는 점이었다. 2층에 올라가면 탁 트인 바다가 우리를 반겼다. 야외 테라스엔 테이블이 없었지만 창가 쪽에 앉더라도 바깥 풍경이 잘 보였고, 날이 선선할 땐 통창을 활짝 열어두었기에 시원했다. 그렇게 나는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대학 동창들과 함께 안목 해변에 찾아오는 날이면 카페 〈씨엘커피〉를 아지트 삼아 지냈다.
그곳에서 우리는 별것 아닌 일에도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그맘때쯤 스마트폰이 널리 사용되면서 찍었던 고화질 사진들이 아직도 웹하드에 남아있다. 카페가 너무 예쁘다며 포즈를 취하고 찍었던 사진과,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배를 부여잡고 환하게 웃는 사진들, 안목 바다를 보자마자 어린아이처럼 뛰어가던 친구의 뒷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고작 바다를 보며 그렇게나 좋아하다니, 역시 서울 촌사람이네!”하고 놀렸던 나까지. 대학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취업 준비를 하게 되면서 외로웠던 시절에 나는 그 추억을 종종 꺼내어보았다. 언젠가 강릉에 다시 가게 된다면 꼭 안목 해변을 들러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고도 몇 년이 더 지나서야 취직을 하게 된 나는 강릉으로 돌아가게 된다. 업무가 조금 익숙해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예전 그때처럼 대학교 정문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마지막 종착점인 안목 해변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도 이젠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가 생겼고, 역사가 오래된 카페들은 리모델링을 해서 예전의 모습과 조금 달라졌지만, 카페 〈씨엘커피〉만큼은 그대로였다. 다양한 음료와 차창 너머로 파도치는 해변의 모습, 아이보리톤의 뽀얀 분위기와 편안한 의자까지. 달라진 건 좀 더 나이가 든 내 모습과, 이젠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변화한 취향뿐이다.
최근에는 안목 해변을 꽉 채운 다양한 카페를 한 번씩 찾아가 보느라 조금 소홀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마음속 안목 해변의 최고의 장소는 카페 〈씨엘커피〉뿐이다. 그곳의 2층 계단으로 올라서는 순간, 마음만큼은 여전히 스무 살이 되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