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라이픈 커피>
한창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하다가 오랜만에 속초에 내려왔던 어느 날. 요즘 속초에도 관광객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젊은 청년들의 톡톡 튀는 매장이 많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고성만 가더라도 바닷가에 멋진 카페가 많다고 했다. 나는 마침 강릉에서부터 직접 운전해서 왔던 터라, 이번에는 차를 타고 조금 멀리 가볼까 싶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새로운 카페를 도전하고자 지도 앱을 켰다가, 또다시 본가 앞에 생긴 카페를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이번엔 진짜로 집 앞 골목이다. 여긴 정말, 진심으로 아무것도 없는 주택가인데 뜬금없이 카페가 입점했다고? 자칭 ‘프로 카페탐방러’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을 자극한다. 나는 곧장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카페로 향했다. 그 카페가 바로 속초 〈라이픈 커피〉이다.
카페가 들어선 자리는 주변에 온통 주택만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길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이곳에 쌀과 달걀을 쌓아놓고 판매하는 매장이 있었다가 한참 뒤 문을 닫으면서 상가 외관만 남고 사라진 곳이었다. 유리가 온통 불투명한 시트지로 가려져 있어서 그동안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여기에 카페를 만들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낼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신한다.
처음에는 솔직히 사장님이 좀 걱정됐다. 장사가 될까 싶었다. 주변에 먹거리 촌 같은 번화가가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회사 상권도 아니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매일 커피를 사서 마실 것 같지도 않았다. 거긴 주차장도 없는 골목길이어서 손님들이 멀리서 찾아오기도 힘들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페가 사라지면 어떡하지? 인테리어도 아늑해서 마음에 들고 커피 맛도 쓰지 않아서 좋은데. 작은 공간이지만 로스팅 기계를 놓고 직접 원두도 볶는 곳이라서 나는 정말 정말 좋은데. 한적한 분위기도 좋지만,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카페는 승승장구했다. 심지어 타지에서 온 관광객들도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이 동네를 찾아올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카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커피부터 실력이 탄탄했다. 〈라이픈 커피〉는 한쪽 공간에 기계를 놓고 원두를 직접 로스팅하는 가게였는데, 다른 카페보다 원두의 탄 맛이 덜하도록 마일드하게 볶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커피가 쓰지 않았고 깔끔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평소 커피를 진하게 마시던 나도 〈라이픈 커피〉의 깨끗한 맛에 반해 종종 찾아가곤 했다.
이 동네에는 없었던 다정하고 포근한 분위기가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밝은 빛깔의 참나무 가구를 사용했고, 실내에도 커다란 화분을 많이 키우셔서 전체적으로 맑은 초록빛이 가득했다. 가게 앞이 시멘트 바닥과 차도로 되어있어 삭막한 느낌이 날 수도 있었는데, 잘 키운 화분들이 눈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서울에서 오셨다는 사장님의 안목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내가 이 카페를 좋아하게 되었던 포인트는 가게 오픈 초반에 상주하던 고양이였다. 아마 길고양이가 오며 가며 이곳에 잠시 정착한 것 같았는데, 가게에 들어서는 손님에게 관심이 있으면서도 아닌 척하는 도도함이 귀여웠다.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으면 슬쩍 발밑에 와서 앉는 등 밀당도 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그랬던 고양이가 꼭 내게는 다가오지 않아서 살짝 섭섭했지만,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내리쬐며 노곤해 보이는 모습을 보면 내가 다 행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가끔은 그 고양이가 생각나서 카페에 이틀 내리 간 적도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조용하고 맛있는 커피집이라고 생각했던 카페 〈라이픈 커피〉는 해가 지날수록 점점 유명해져 갔다. 아마도 원두와 드립백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입소문을 탄 것 같았다. 방문할 때마다 매번 손님이 많아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확히는 모르고 있다가, 여름휴가 겸 속초 본가에 내려왔던 날 그 규모를 깨닫고야 만다. 관광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외진 주택가에 관광객들이 바글바글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다른 카페로 향했던 그 여름의 나는 어쩐지 기쁘면서도 조금 서글픈 양가감정을 느꼈다. 나만 아는 줄 알았던 우리 동네 소중한 카페가 어느새 핫플레이스가 되어서, 집 앞인데도 갈 수가 없다니! 마치 인디음악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만 아는 소중한 노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다 듣고 있을 때 느끼는 오묘한 기분 같았다.
그렇게 속초에 며칠 머무른 뒤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야 했던 어느 날. 이번에 강릉으로 가면 한동안 속초에 내려오지 못하는 상황이던 나는, 아쉬운 마음에 커피를 포장하면서 카페에 진열되어있던 드립백도 함께 구입하게 된다. 그런데 강릉으로 돌아와 뚱뚱한 커피포트로 대충 물을 붓고 내려 마셨는데도 커피에 꽃향기가 가득한 것이었다. 그때의 기분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항상 드립백을 구입하면 어딘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 드립백만큼은 예외였다. 그때 나는 〈라이픈 커피〉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외진 동네에서 이만큼 정성 들여 로스팅한 원두커피를 내준다면 누구나 반할 것 같았다.
이제는 그때보다 더욱 유명해져서 주말에 방문하려면 카페 오픈 시간에 맞추어 찾아가야만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을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사람이 많지만, 평일에 가거나 여름휴가 시즌을 피해서 가면 여전히 내가 알던 조용하고 커피 맛있는 카페 〈라이픈 커피〉로 돌아와 반겨준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멋진 카페가 생겼다니 어쩐지 뿌듯한 마음도 든다. 언젠가 나도 이런 평화롭고 따뜻한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