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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Oct 22. 2023

힘들 때면 찾아가는 묵호 바다

동해 <논골카페>

전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던 규님은 이십 대 후반 강릉 생활에서 최초로 만난 친구였다. 규님은 제법 독특한 사람이었는데, 생의 유한함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고, 무언가를 모으기보단 지금 이 순간 쓰고 즐기며 소진해버리는 스타일이었다. 고향은 부산. 어쩌다 보니 부산에서 강릉까지 일하기 위해 올라왔는데, 평일에도 주말에도 어쩐지 마음이 허전할 때면 운전을 하며 달랜다고 했다. 무작정 차를 끌고 나가서 발길 닿는 대로 향했다가, 근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주변을 둘러본 뒤 집으로 돌아오는 식이었다.


동해 〈논골카페〉를 가게 된 건 그런 규님의 추천 덕분이었다. 나는 속초, 강릉 지리만 빠삭했고 강원도의 다른 도시는 잘 알지 못했는데, 혼자 짧은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 규님이 동해에 경치가 멋진 곳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사실은 규님도 처음엔 회사동료분께 이곳을 추천받아서 찾아오게 되었는데, 탁 트인 바다 풍경이 마음에 들어서 지금은 혼자서도 곧잘 방문한다고 했다. 나도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에 선뜻 동의했다. 마침 출장을 갔다가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이어서 타이밍도 좋았다. 우리는 점심시간을 핑계삼아 국도로 돌아가면서 동해에 들렀다. 그날따라 하늘이 구름한점 없이 파랬다. 정말이지 누가 봐도 바다에 가야만 하는 날씨였다.


규님은 어촌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나게 높은 언덕으로 계속해서 차를 운전하여 올라갔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규님은 그런 자리에 카페가 있다고 했다. 골목길을 지나 등대 옆 주차장에서 내렸을 때도 반쯤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골목마다 틈틈이 놓인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와 펜션 같은 매장들을 지나 절벽 끝에 수평선이 보이는 순간, 나는 나 역시도 그 공간을 사랑하게 되리란 걸 알았다. 그 길의 끝에 있던 작은 카페. 그곳이 바로 동해 묵호항에 있는 〈논골카페〉였다.




〈논골카페〉는 다른 관광지의 카페들과는 다르게 세련된 외관도, 휘황찬란한 인테리어도 없었지만 그래서 좋았다. 오로지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묵호항의 전경과 저 멀리 수평선까지 보이는 광활한 바다가 더 가치 있게 느껴졌다. 커피는 평범한 맛이었지만 가격이 저렴했고, 무엇보다 풍경이 엄청났다. 동해시에서 직접 투자하여 운영하는 카페여서 가격이 저렴할 수 있다고도 했다.


야외 테이블도 있었으나 절벽 앞이라 그런지 바닷바람이 거셌고, 또 그때는 겨울이었기에 우리는 따뜻한 실내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규님은 한참이나 바다를 바라본 후에야, 이곳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를 비밀처럼 알려주었다. 그는 이곳의 풍경이 자신의 고향인 부산과 비슷해서 마음이 간다고 했다. 그래서 평일에도 근무가 끝난 뒤 이곳에 와서 밤바다를 가만히 관찰하다가 간다고도 했다.


나는 카페로 오는 길에 보았던 풍경을 다시 떠올리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높은 절벽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논골카페〉 주변에는 아직 개발되지 못한 옛날식 슬레이트 지붕들이 계단 형태로 즐비해 있었는데, 그게 꼭 부산의 풍경을 축소해놓은 것 같았다. 부산여행을 하며 자주 보았던 어촌동네의 느낌이 분명 있었다. 항상 의연하고 무심해 보였던 규님이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부산도 바다가 멋진 동네이니까 더 생각났겠구나 싶었다. 나도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훗날 나는 친척 동생 제이를 그곳에 데려가 소개해주게 된다. 과거 오랫동안 취업준비를 하고 공부하면서 마음이 많이 지쳐있을 때 나는 바다에 가면 마음이 후련한 기분이 들었는데, 제이에게도 어쩌면 그런 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오래된 SUV를 끌고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부디 제이도 그곳을 좋아했으면 했다. 그녀에게 묵호등대 언덕의 탁 트인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없이 뜨거웠던 여름날, 카페에서 차가운 음료를 주문하고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우리는 1년 뒤 발송될 편지를 썼다. 〈논골카페〉 앞에 놓여있는 빨간 우체통에 엽서를 넣으면 1년 후 그 엽서가 잊힐 때쯤 보내준다고 했다.


우리는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은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 해내고 싶은 일들, 소망들, 때로는 지칠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도전해 온 것들에 대해 기록했다. 무료로 보내준다던 그 편지를 우리는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로 적었다. 그리고는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오래된 칼국수 가게에서 수타면 장칼국수도 먹고 바닷길 구경도 하다가 해가 질 때쯤에야 집으로 돌아왔더랬다.




이후에도 유를 그곳에 데리고 가서 갓 쪄진 새우만두도 사 먹고, 근처의 여행 독립서점과 지역 소품샵도 구경하면서, 카페를 넘어 점차 추억의 공간을 넓혀갔다. 그렇게 회사 동료분의 추억이 규님의 추억이 되고, 규님의 추억은 다시 나의 추억이 되고, 그걸 내가 유와 제이에게 전하면서 또다시 그들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다 보면 미래에는 돌아가고 싶은 소중한 한때가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일이 사치라며 만류하지만, 내게 카페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다. 내게 카페란 그 공간에 나의 젊음, 추억, 사랑 같은 것들을 한가득 담아두고 가끔 꺼내어보는 마음의 통로. 추억을 나누고 다시 채우는 공간이다.


좋았던 곳은 다시 가고 싶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그 행복한 기억을 전해주고 싶으며, 그에게 맛있는 디저트를 먹여주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새로운 카페와 맛있는 커피를 찾아 거리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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