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칠성조선소>
누구에게나 마음이 심란할 때 찾아가는 장소가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나에게 청초호 호수공원은 그런 존재였다. 넓은 호수공원 부지 중에서도 내가 자주 머무는 장소는 도자기 미술관 옆의 고즈넉한 정자 근처다. 그곳에서 바다 방향을 바라보면 온 동네가 훤히 보였다. 낮에는 환하게 탁 트인 풍경이 멋있었고, 밤에는 저 멀리 아바이마을까지 조명이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사랑하는 장소였다.
청초호는 학창시절 내내 소풍으로도 자주 갔던 장소였다. 특히 중학교 졸업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그 정자 근처에서 찍었다. 고등학교 때에도 청초호 상징탑 앞에서 인라인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탔다. 대학에 가서도 용돈이 부족하면 친구와 청초호 호숫가에 앉아서 오래 수다를 떨기도 하고, 친구네 강아지 ‘코코’와 함께 산책하는 등 많은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런데 주변에 조선소가 있었다는 사실은,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을 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때는 바야흐로 전염병이 출몰하기 직전. 그때쯤 나는 ‘새 소년’이라는 인디밴드를 좋아하게 되면서 그들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그런데 무려 그 ‘새 소년’이 속초에 공연하러 온다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다른 인디 가수들도 많이 초청되어 온단다. 그럼 무조건 가야지!
그런데 공연 이름과 공연장 상호가 모두 초면이다. 〈칠성조선소〉라는 장소가 생소해서 지도로 검색해보니 카페라고 했다. 근데 그 외엔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위치도 내가 자주 가는 청초호 산책 지점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처음 들었다. 여긴 도대체 뭐지? 사장님은 뭐 하는 사람이기에 여기서 뜬금없이 뮤직 페스티벌을 연다는 거지?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고민만 하다가 결국 입장권은 예매하지 못했으나, 축제 당일에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노랫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갔다. 그 밤중에 맥주 한 캔 사들고선 조선소 근처를 서성거렸던 기억. 아니나 다를까, 공연이 야외에서 개최되면서 청초호 호숫가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연장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아무리 서성여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내년에 또 이런 공연을 한다면 그땐 꼭 공연표를 예매해서 보러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해에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후에야 그때 그 조선소가 정말 카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 직장동료 규님과 그의 친구였던 유까지 셋이서 함께 속초로 여행왔던 날이었다. 그날 우리는 규님의 최애 카페를 소개받았는데, 그게 바로 카페 〈칠성조선소〉였다.
알고 보니 이곳은 사장님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오래된 조선소 부지를 개선해서, 뮤직 페스티벌도 열고 카페로도 운영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조선소의 풍경을 해치지 않고 보존하면서도 장소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박물관 같은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있었다. 조선소 부지 한쪽에 있는 작은 카페 건물에서 호록호록 아메리카노를 마셨던 기억. 커피 맛도 괜찮았고, 그곳에서 바라본 청초호도 새로웠다. 속초에 오래 살았지만 여태껏 보지 못했던 각도의 풍경이었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시선을 달리하면 익숙한 것도 이렇게나 신선해질 수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오래된 조선소를 카페로 만들 생각을 한 것도, 이곳에서 공연을 개최할 결심을 한 것도 어쩌면 이 공간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았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칠성조선소〉는 청초호가 잘 보이는 자리에 있다 보니 카페 규모에 비해 항상 손님이 많았고 시끌시끌했다. 나는 카페에 몇 번 더 방문하려고 했지만, 나도 그곳을 찾는 다른 사람들처럼 주말이나 명절에만 갈 수 있었기에 항상 좀 더 조용한 다른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곤 했다.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카페에 다시 방문했을 때에서야, 예전의 작은 건물이 아니라 옆의 큰 건물로 확장 이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내가 이전보다 크고 화려해졌고 좀 더 공장 같은 전문적인 느낌이 났다. 예전 카페 자리에는 독립서점이 들어서서 각종 책과 소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서점 쪽을 방문했다가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던 기억.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은 아니었는지, 사장님께서 카페는 정면의 큰 건물로 이전했다고 알려주셨다.
그것 외에는 최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으로 여전히 잘 운영되고 있다. 규님은 여전히 속초에 방문할 때마다 꼭 〈칠성조선소〉에 가서 커피를 마신다고도 했다. 나는 자주 가진 못하지만, 가끔 유와의 추억이 생각날 때면 혼자 찾아가곤 한다. 과거에는 다 만들어진 배가 바다로 나가던 자리였을 야외 벤치에 앉아서 아인슈페너를 홀짝이며 청초호를 바라보는 것도 나름 운치 있다.
그날 카페 〈칠성조선소〉를 방문하고 강릉으로 돌아가면서, 규님의 친구였던 유는 차 안에서 할머니와 통화하던 내게 처음으로 반했다고 했다. 그때 규님이 속초에 풍경이 멋진 카페가 있다면서 우리를 태우고 속초까지 찾아가 〈칠성조선소〉를 소개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인연은 어쩌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쩐지 더 추억이 가득한 공간으로 느껴진다.
잔잔하고 고즈넉한 조선소 부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길고양이들과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랑이 싹텄던 20대의 내 모습이 그 공간에는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