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읽거나 - 아니면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보통 살인 그 자체만 놓고 시작합니다. 그것은 어설픈 생각이지요. 살인이란 오래 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살인은 여러가지 상황이 주어진 시간과 주어진 장소로 총집결되는 최정점입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로이드 씨는 말레이에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맥휘터 씨는 과거에 자살을 기도했던 곳에 다시 와보고 싶다는 이유로 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살인 그 자체는 이야기의 종국이죠. 그것은 바로 0시입니다."
- p. 274.
. 애거서 크리스티의 탐정들 중 유독 배틀 총경만이 가지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건을 해결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체의 이야기에선 조연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포와로와 마플 여사는 물론이고 배틀 총경보다 출연 수가 더 적은 토미와 터펜스 부부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동안 배틀 총경이 나오는 다섯 편의 소설을 보면 사건 내내 활약하는 주인공은 따로 있고 배틀 총경은 작품 후반쯤 '목석같은' 표정을 하고 느지막하게 나와서 '당신이 여기저기 뛰며 힘들게 알아낸 것은 우리 경찰이 진작 다 알고 있던 것들입니다. 체포는 경찰에게 맡기시고 당신은 연애나 즐기시오.' 하는 식으로 사건을 급마무리 해버린다. :)
. 그러다보니 상당히 이른 시점부터 '침니스의 비밀'이나 '세븐 다이얼스 미스테리' 같은 소설에 연이어 등장했음에도 그저 '유능한 경찰 1'일 뿐 그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없는 인물이었고, 이후 포와로, 올리버 부인, 레이스 대령과 함께 '테이블 위의 카드'에 동반출연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매력이 부각되기는커녕 포와로 옆에서 재프 경감만도 못한(재프 경감은 최소한 웃기기라도 한다) '무능한 경찰 1'이 되어버리는 참사가 벌어지고 만다. 그 시절에 인터넷이 있었다면 캐릭터 붕괴라고 팬들의 원성이 높지 않았을까. :)
. 그렇게 테이블 위의 카드 이후 8년만에 배틀 총경이 무려 주인공으로(!) 재등장한 이 소설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는 속죄라도 하듯이 배틀 총경을 위한 여러 설정을 열심히 만들어낸다. 갑자기 가족들이 생겨나 애처가가 되더니 무려 자녀가 다섯에 조카까지 등장하고, 자연히 목석같았던 이미지도 많이 유해지게 되었다. 특히 이야기 초반엔 엉터리 심리학에 심취한 학교 선생으로부터 딸의 누명을 벗겨주는 등 훈훈한 활약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자 또다시 커플들에게 엔딩 자리를 내주고 만다.
. 더구나 이 소설을 마지막으로 크리스티는 더 이상 배틀 총경을 출연시키지 않는다. 후기작에서 배틀 총경의 조카가 경찰이 되고 포와로가 그 조카를 만나 배틀 총경은 꽤나 유능한 경찰이었다고 '나름' 칭찬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정작 배틀 총경 본인이 직접 다시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크리스티 여사의 수다스러운 성격(?)상 말수적은 캐릭터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드는 게 너무 고역이었던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Top 10을 꼽을 때 거의 언제나 들어간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래저래 아이러니한 걸작이다. 만년 조연이 드디어 훌륭한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얘기니까(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