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이 아닌,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운명 - 임레 케르테스(다른우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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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강제수용소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동경이었다.



어디선가 달그락거리는 익숙한 소리가 아득한 꿈속에서 들리는 종소리처럼 내 귀로 밀려들어왔다.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헤매던 내 눈에 곧 저 아래쪽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을 끙끙대며 들고 가는 일련의 사람들이 띄었다. 어깨 위로 비스듬히 작대기들을 걸치고 있었다. 대기 중으로 퍼지는 떫은 냄새 때문에 멀리서도 나는 이것이 '양배추 무 수프'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아쉬웠다. 이 광경, 이 냄새가 벌써 무딘 내 가슴에도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메마른 눈에서조차 몇 방울 뜨거운 눈물을 차가운 얼굴 위로 쏟아내게 하는, 마치 몰아치는 파도처럼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하나의 동경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더 집요하게 마음속을 울려대는 그 은밀한 동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아름다운 강제 수용소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동경이었다.

- p. 209.




. 삶은,

어떤 중요한 시점에서 다른 중요한 시점까지의 요약과 총평이 아니라,

그 속의 한 순간 한 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 이런 시각은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있고,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고, 합리화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15세의 어린 나이에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이의 수기라는 건

그런 즉각적인 불편함과 거부감으로 쉽사리 반박해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를 만큼의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 굶고,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얻어맞고, 병에 걸리고,

바로 옆 자리에 있던 이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끌려가고,

주인공 역시도 어제든 그렇게 될 수 있었다.


. 그럼에도 그 곳에서도 숨돌릴 틈이 있었고,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있었고,

주어지는 상황과 일들을 그저 "A에서 Z까지 알파벳 순서처럼' 무덤덤하게 - 때로는 성취감까지 느끼며 처리해가는 시간들이 있다.


. 그렇게, 소년은 끝없어 보이는 수용소의 삶도 결국 한 순간 한 순간의 연속일 뿐이라고 말한다.


. 그 끝에서 작가는 그가 겪었던 고난은 물론이거니와,

읽는 이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강제수용소에서의 쉼'과 '행복'까지도

분명 그가 경험했던 사실이자 그가 살았던 삶의 한 순간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러기 위해선 그곳에 있던 한 순간 한 순간을 끊임없이 곱씹고 되새겼어야 하기에,

1945년 종전으로 인한 석방 이후 이 책을 쓰기까지 20년, 보완과 퇴고까지 합하면 30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겠지.

그리고 그 오랜 시간을 거친 연후에야, 그가 겪은 삶은 남의 정리와 평가에 의한 것이 아닌, 오로지 그만의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이고.


. 이 책은 그런 소설이다. 그리고 그래서 귀하다.




빵집 주인이 배급량에서 얼마씩 챙긴다는 소문은 나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화가 난 듯한 매서운 눈초리와 능숙한 손놀림을 보자니 어쩐지 이 남자가 유대인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일 유대인을 싫어하지 않으면서 유대인들의 빵을 조금씩 떼먹는다면 그것은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대인을 싫어한다는 확신이 있는 경우라면 그것은 확고한 신념에 따른 타당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신념과 행동의 앞뒤 관계가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 p. 17.


내 머릿속으로 이런 그림들이 그려진다. 한 사람이 먼저 가스실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즉시 욕탕을, 그 다음 사람은 비누를, 또 그 다음 사람은 화단에 대한 착상을 덧붙인다. 그들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놓고 오랫동안 토론을 벌이고, 손질하고, 마침내 즐겁게 마무리를 지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이것이 내게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만 같다) 그런 다음 서로 굳게 악수를 나눈다.

- 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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