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돌릴 틈 없이 밀어닥치는 구원과 만남과 파국의 이야기

달의 궁전 - 폴 오스터(열린책들)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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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야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만큼 강력한 단 한 가지 것이다.



1972년 1월 3일, 나는 레이크 엘시노어라는 곳에서 다섯 켤레 째 신발을 사 신었고 그로부터 사흘 뒤에는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채 라구나 해변 마을로 이르는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내 호주머니에는 4백 13달러가 들어 있었다. 그 언덕 꼭대기에 이르자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물가에 이를 때까지 내리막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내가 신발을 벗고 발바닥에 와 닿는 모래를 느낀 것은 오후 네 시였다. 나는 세상 끝까지 온 것이었고 그 너머로는 바람과 파도, 중국 해안까지 곧장 이어진 공허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여기가 내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

나는 마지막 남은 석양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그 해변에 서 있었다 내 뒤쪽으로 라구나 해변 마을이 귀에 익은 세기말의 미국적 소음을 내며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해안의 굴곡을 바라보고 있을 동안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언덕 위에서 달이 떠올랐다. 달아오른 돌처럼 노란 둥근 보름달이었다. 나는 그 달이 어둠 속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눈 한 번 떼지 않고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p. 445.



. 가끔 추리소설 이야기 - 특히 일본 추리소설 이야기를 할 때 "온다 리쿠의 시대"가 있었다는 얘기를 종종 했었는데,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는 '폴 오스터의 시대'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 열린책들에서 아담하고 예쁘장한 하드커버 케이스로 폴 오스터의 책들이 하나하나 나오기 시작했고, 한창 책읽을 시간이 남아돌던 시기의 나는 정신없이 폴 오스터에 빠져들었다. '뉴욕 3부작'을 가장 먼저 읽고(이건 확실하다), 바로 이어서 '우연의 음악'을 읽고(이건 좀 확실치 않다^^;)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폴 오스터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서, 공중곡예사나, 신탁의 밤이나, 스퀴즈 플레이 같은 작품들을 정신없이 읽으면서 남은 책이 줄어드는 걸 아쉬워했는데, 그 때 함께 읽었던 책이 이 '달의 궁전'이다. 주인공이 극도의 생활고에 빠져 있으면서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멀지 않은 파멸을 멍하니 바라보고, 때로는 자신의 파멸을 스스로 부추기는 모습을 그려내는 이야기의 처음 부분부터 나는 폴 오스터의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악기점에 다녀온 지 사나흘 뒤에 벌어진 조그만 재난이 하마터면 나를 익사시킬 뻔했다. 내가 하루치 식사로 냄비에 넣어 삶으려던 달걀 두 개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져 깨진 것이었다. (중략) 달걀은 떨어지자마자 그대로 박살이 났다. 나는 그것들이 마루바닥 위로 번지는 동안 겁에 질려 서 있던 내 모습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샛노랗고 반투명한 달걀의 내용물이 마루 틈으로 스며들면서 순식간에 질퍽한 점액과 깨진 껍질이 사방으로 번졌다. 노른자 한 개는 기적적으로 떨어져 내린 충격을 견뎌냈지만 내가 몸을 굽혀 그것을 떠 올리려고 하자 스푼에서 미끄러져 깨지고 말았다. 나는 마치 별이 폭발한 것 같은, 거대한 태양이 막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른자가 흰자위로 번지더니 다음에는 거대한 성운, 성간 가스의 잔해로 바뀌면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내게는 그 노른자가 너무 엄청난 것,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마지막 지푸라기였기에 그 일이 일어나자 나는 그만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 p. 66.




. 폴 오스터는 지극히 사실적이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잡담으로 여겨지는 어투를 가지고 주인공이 겪는 비일상을 '어마어마한 속도와 분량으로' 쏟아낸다. 처음에는 그렇게 쏟아지는 말의 홍수에 허덕거리며 페이지를 넘기기 바쁘지만, 그렇게 그의 문장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묘한 리듬감이 느껴진다(그래서 하루키도 '슬픈 외국어'에서 폴 오스터를 만났을 때 악기 연주에 능숙하지 않은지 물어본다. 그 질문에 폴 오스터는 악기를 연주하지는 못하지만, 마치 건반을 두드리듯 아무 내용없이 타자기를 두드리는 버릇이 있다고 대답한다). 마치 실력있는 래퍼가 듣는 사람의 귀에 랩을 탁탁 꽂는 것처럼 그의 문장 역시도 눈에 들어와 박히고, 그때부터는 미친 듯한 속도로 흘러가는 그의 이야기에 속도를 맞출 수 있게 된다.





나는 정신을 가누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밖으로 나가 달의 궁전으로 가서 음식을 시키고 돈을 물쓰듯 써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자기 연민이 무절제한 방종에 굴복했고, 나는 그런 충동에 굴복한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 혐오감을 더 길게 늘일 셈으로 나는 달걀을 풀어 만든 수프부터 주문하기 시작했다. 짓궂은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프에 뒤이어 나는 튀긴 고기 만두, 소스를 친 새우 요리 한 접시, 그리고 중국산 맥주를 한 병 더 시켰다.

- p. 67.





. 그렇게 무기력과 방관, 그로 인해 파멸을 향해가던 주인공의 인생, 그런 그의 삶에 나타난 갑작스러운 구원(그걸 구원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휠체어를 탄 기묘한 노인과의 만남과 더 기묘한 노인의 인생, 그로 인한 또 다른 만남과 파국과 이 모든 것을 딛고 태평양을 향해 걸어서 서해안에 도착하기까지 폴 오스터는 결코 읽는 이가 잠시 멈추도록 - 책갈피를 꼽고 잠시 책을 덮은 채 마트를 가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침대 매트리스에 누워 내일을 기약하도록 - 놓아두지 않는다. 그렇게 막판에는 거의 작가에게 멱살이 잡혀 질질 끌려가는 느낌으로 주인공과 함께 걷고 또 걸어서 태평양이 바라다보이는 해변에 이르게 되면, 그제서야 목구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길디 긴 숨을 내뿜을 수 있게 된다.




"이 멍청한 바보 자식아."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 말을 꺼냈다가 긴 얘기를 늘어놓아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던지 똑같은 소리로 되뇌었다. "이 멍청한 바보 자식아. 이 불쌍한 바보 멍청아."

- p.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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