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결말의 갈래길에 서서

냉정과 열정 사이 -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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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역시 오지 않아, 하고 생각했다.
빵을 씹으면서, 그렇게 평온하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오이의 서른 살 생일날에 피렌체의 두오모 꼭대기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은 그냥 구두선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예상이 하나의 사실로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 나눈 약속이다. 그 후 불행에 빠지기도 하면서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온 현재의 두 사람에게, 그때 나누었던 농담 같은 약속이 실현될 가능성은 일 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다카시는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Blu편, p. 147. 엷은 핑크빛 기억




. 2000년 국내 출간, 2001년 일본에서 다케노우치 유타카, 진혜림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극장에서 개봉, 2003년 국내에서 개봉. 시기를 하나하나 확인하다보면 이게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였구나 싶어 새삼 놀라게 된다. 2003년이면 '해변의 카프카'가 처음 번역되고, '로마인 이야기'는 아직도 한창 나오고 있었던 시기였는데.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영화나 드라마가 하나씩 들어오기도 했고. 아무튼.


. 이 이야기도 그런 시기에 처음 접했었다. 책으로 본 건 아니고 영화의, 그것도 후반 30분 정도만을 부분부분 본 것이었지만. 영화의 메인 테마의 'The Whole Nine Yards'가 TV에서 종종 흘러나오고, 그 때는 뽀송뽀송했던 다케노우치 유타카의 밀라노 기차역 엔딩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열린책들에서 하드커버로 폴 오스터 시리즈가 소개되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제와선 20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이 흐릿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억에 기억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의외로 기억은 선명하고 회상은 수월하게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지만, 이제는 정말 아무튼. :)


.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봤던 영화의 후반부는 이 책의 '결말의 결말'에 해당하는 얘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책의 결말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누군가가 그 뒷부분을 조금 더 손대서 완성시킨 게 영화의 결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세 가지의 결말이 있다. 에쿠니 가오리가 쓴 'Rosso'의 결말과, 츠지 히토나리가 쓴 'Blu'의 결말과, 영화의 결말이. Rosso의 결말은 가차없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이야기를 매조지하고, Blu의 결말은 그와 반대로 어떻게든 둘의 관계를 붙잡아두어 여운을 남기려 하고, 영화의 결말을 그 여운까지도 이야기로 편입시켜 보는 이에게 들이민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영화의 결말이 제일 별로일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결말을 앞두고 천천히 흘러나오다 엔딩에서 작정하고 한껏 터지는 메인 테마는 너무도 애절했고, 다케노우치 유타카의 한껏 깔린 저음과 마지막 미소는 너무나 멋있었기 때문에. :)


. 이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유독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재회'라는 주제를 다룬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라면야 그 때 헤어진 건 누구의 잘못이 더 크니까 그냥 빨리 다른 사람 만나서 잊어버려라, 10년 후의 약속 같은 걸 누가 기억이나 하겠냐고 이야기하겠지만, 이 시절만 해도 기다린다는 행위 그 자체가 공감대를 얻고 감성을 끌어내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거기다 그 이전 세대의 이야기들과는 달리 기다리는 동안 서로 각각 만날 사람 만나고, 각각 열심히 일하면서 외로움과 아쉬움을 대체한다는 현실성까지 있으니까.... 라고 말한다면, 너무 꼬인걸까. ^^; 그렇게 10년이라고 하면, 은근 금방 아닌가 하고 생각해버리는 건 역시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겠지. :)




결국 나는 과거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메미와 헤어지고 과거의 약속을 지킬 단 하나의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약속 같지도 않은 그 약속, 그것은 아오이의 생일날 피렌체 두오모 위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학창 시절, 장난처럼 주고 받은 약속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상, 그녀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가능성이 제로만 아니라면,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가 아닐까. 그리고 그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것은 점점 더 내 속에서 숭고한 약속으로 고양되어 갔다.

- Blu편, p. 193.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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