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 내 눈이 보이질 않아. 그녀는 젊어서 죽었어...."
".... 질투란 건 꼭 무슨 이유나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는 게 아니거든요. 그건 좀 더 - 뭐라고 해야 할까? 좀 더 근본적인 것에 뿌리를 둔 감정이니까요. 질투의 근본은 사랑을 보답받지 못하는 것을 앎으로 해서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다리고 지켜보고 기대하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 다른 사람에게 기울어지길 말예요. 그리고 그 다음에도 그런 일은 거듭거듭 되풀이되지요."
- p. 206.
. 마플 양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크리스티 여사가 별세하고 나서 발표된 소설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2차 대전 중에 유작으로 계획해서 쓰여진 소설이기 때문에 같은 유작이라도 생전에 쓰고 미처 발표하지 못한 '운명의 문' (토미&터펜스 부부의 마지막 작품)이나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커튼'(포와로의 마지막 작품)과는 달리 마플 양이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은 아니다. 그래서 '목사관 살인사건'이나 '화요일 클럽의 살인'에 나왔던 마플 양의 조카인 레이먼드 웨스트와 그의 아내인 조안이 아직 젊은 나이로 나오는데다 '깨어진 거울'에서는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오는 벤트리 대령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플 양이 아직 쌩쌩하게 돌아다닐 수 있으시고. :)
. 그러니 마플 양의 마지막 작품은 역시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복수의 여신'으로 보는 게 맞고, 이 소설은 '서재의 시체'와 깨어진 거울 시기 사이에, 마플 양이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을 벗어나서 영국 시골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이야기 중 하나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옆동네 3부작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래서 '예고살인'을 기분 좋게 읽고, '쥐덫'으로 넘어가기 전에 마플 양이 등장하는 작품을 하나 더 읽어봐야겠다 싶어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 오래전에 벌어진 사건을 추리한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설정은 '회상 속의 살인'과 비슷하지만, 이 소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인 그 자체가 있었는지"부터 추리를 시작하는 게 이색적이다. 막 결혼해서 뉴질랜드에서 영국으로 건너 온 21살의 그웬다는 남부 지방을 돌아다니다 왠지 모르게 첫눈에 끌린 집을 사게 되지만, 그 집에서 자꾸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점점 심화되던 그녀의 불안은 마플 양과 웨스트 부부 동반으로 보게 된 연극에서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 내 눈이 보이질 않아. 그녀는 젊어서 죽었어...." 라는 대사를 듣는 순간 목졸린 젊은 여성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경악과 절규로 터져나오게 된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자신의 상태에 공포를 느낀 그웬다를 마플 양이 달래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렇게 기억에도 없고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은 '잠자는 살인'이 하나씩 드러나게 된다.
마플 양은 부드럽게 물었다. "누가 죽었다고요?" 대답이 매우 빠르고도 기계적으로 나왔다.
"헬렌이었어요...."
- p. 34.
. 그나마 회상 속의 살인은 16년 전, 주인공이 5살 때 벌어진 사건과 그 판결의 진실을 밝혀나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기록이 확실한 데 비해, 잠자는 살인에선 일단 사건이 벌어졌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기록은 없고, 그웬다의 기억 속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은 사랑의 도피로 인한 행방불명으로 처리된데다, 그녀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 역시 연극의 대사와 원숭이의 앞발 같았다는 범인의 손에 대한 기억 뿐이다. 그로 인해 이 소설의 전반부는 잊혀져 있던 사건을 처음부터 재구성하는데에 할애되고, 덕분에 이 소설은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가지는 가장 큰 약점 - 사건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초반이 너무나도 지루하다는 것 - 을 절묘하게 비껴간다.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마플 양과 그웬다 부부는 사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추적해나가고, 그렇게 지방 마을의 부동산과 정원과 온갖 상점들을 돌아다니는 동안 처음 100여 페이지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크리스티 여사는 챕터 하나, 10여 페이지 정도를 할애해 사건을 설명하는 대신 100여 페이지 동안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직접 사건을 파헤치게 하고, 그게 이 소설의 몰입을 높이는 장치로 작용한다.
. 그렇게 사건을 파헤치는 동안 그웬다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던 18년 전의 상황들과 인물들이 하나씩 등장한다. 살해당한 여자 주변에 있었던 세 명의 남자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X까지. 하지만 그와 함께 결정적인 증인이 될 수 있었던 당시의 하녀는 범행에 대해 증언하려고 편지를 보냈다가 살해된 채로 발견되고, 그웬다가 마시려던 음료에까지 독이 들어가는 등 범인의 손이 점점 뻗쳐온다. 18년 전의 진실이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짐에 따라, 범인 역시도 과거에서 현재로 불리워져진 것이다. 과연 이 이야기의 끝에서 주인공이 먼저 마주치게 되는 건 진실일까, 아니면 범인일까.
"흠, 회상 속의 살인이라. 잠자는 살인. 자, 내 말 좀 들어봐요. 나라면 잠자는 살인은 내버려둘 겁니다 - 난 그렇게 할 게요. 살인사건을 해부하는 것은 위험하죠. 매우 위험합니다."
- p.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