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무라 아키라, 화이팅, 그저 화이팅.

조용한 무더위 - 와카타케 나나미(내친구의서재) ●●●●●●●●◐○

by 눈시울


성야는 막 1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번화가의 네온사인이 반사되어 하늘은 마치 밝은 터널 같았다.




밤하늘은 조용하게 맑았다. 역까지 돌아가는 길에 슈톨렌을 두고 오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걸었다. 성야는 막 1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번화가의 네온사인이 반사되어 하늘은 마치 밝은 터널 같았다.

- p. 382. 성야 플러스 1




. 처음 등장했던 단편집 '네 탓이야'에서 스물 일곱이었던 하무라 아키라가 어느덧 앞자리에 4를 쓰고도 그 뒤에 숫자를 또 붙여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청소업체에 전화상담사, 헌책방에 탐정사무소 등 십여년 넘게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도 체력과 깡만으로 버텨내던 하무라 아키라지만 이제는 악의를 쐬어서 지치는 게 아니라 몸이 힘들어서 지친다. 심지어 그나마 마음 붙일만한 직장이었던 하세가와 탐정 사무소는 소장님의 은퇴로 하루 아침에 문을 닫아버리기까지 했으니. 다행히 일터를 잃은 하무라 아키라 앞에 추리소설 매니아이자 '살인곰 서점'의 사장인 도야마 야스유키가 나타나 서점 2층에 사립탐정 사무소 공간을 마련해주고, 사건이 없을 때는 책방 직원으로도 고용해주면서 추리소설 책방 점장 + 사립탐정이라는 모두가 꿈꾸는 동화같은 행운이 일어나는 줄 알았지만.... 그런 거 없다. 절대 없다(....)




나이가 마흔을 넘으면 부상이 잘 낫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체력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달리기는 무릎에 부담을 주고, 복근 운동을 하면 배에 경련이 인다. 어쨌든 이 세상은 살아가기 쉽지 않다.

- p. 11. 파란 그늘



. 책 속에서 하무라 아키라는 여름 휴가 기간에는 하루종일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햇발 아래를 돌아다니다 돌아와선 에어컨조차 고장난 밀폐된 책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책을 옮기고(조용한 무더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칼바람 속에서 하루종일 사십견과 심부름과 사건과 감기에 시달리다 녹초가 된 채로 차갑게 얼어붙은 슈톨렌을 들고 퇴근길에 오른다(성야 플러스 1). 역시 와카타케 나나미는 어떻게 하무라 아키라를 굴리면 가장 고생할 지를 꿰뚫어보고 있다. 꿈의 일터는 무슨. (__)


. 그렇게 일과 생활에 찌들리는 모습과 사건 해결이 조화를 이루는 게 이 단편집의 매력인데, 특히나 그런 장점이 잘 드러난 단편이 표제작인 '조용한 무더위'다. 가장 더운 휴가 기간에 사건 의뢰가 들어오고, 뙤약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오니 그새 실력이 좋다는 소문이라도 난 건지 의뢰가 계속 이어진다. 그 와중에 살인곰 서점에서 일하는 알바생이 갑작스럽게 결근을 하고, 결국 급하게 사건을 마무리하고 쉴 틈도 없이 에어컨도 틀지 않은 채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일하던 하무라 아키라를 방문하는 이웃. 그리고 하무라가 느끼는 이물감. 같은 단편집의 '소에지마 씨 가라사대'와 함께 그 해 최고의 단편으로 뽑힌 이야기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쪽이 훨씬 더 좋았다. :)




하지만 최근 '숨이 막힐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었다. 온열 증상으로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며, 고령자의 사망도 나왔고, 그 대다수는 실내에서 발병했다고 연일 뉴스에서 떠들어댔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창문도 열지 않고, 에어컨도 켜지 않고, 물도 주지 않고, 뜨거운 방에 방치해 어머니를 열사병으로 살해해도 그게 살인이라고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터였다.

- p. 125. 조용한 무더위



. 네 탓이야부터 '의뢰인은 죽었다', '어두운 범람', '조용한 무더위'까지 책을 죽 세워놓고 하무라 아키라의 행적을 따라가고 있자면 유쾌한 문체 뒤에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삶의 무게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요즘 추리소설들에 널리고 널린 게 변변찮은 취직 자리 없이 어영부영하다 사건에 휘말리는 아마추어 청년 탐정들이라지만, 그들에게 있는 흔한 만남이나 인연조차 없이 십년도 넘게 비정규직으로 여기저기 떠돌다 40이 넘은 나이에 하루 아침에 실직하는 주인공이라니. 바에서 팔자 좋게 위스키나 주문하고 그럴싸한 자가용을 끌고 다니면서 삶은 쓰디 쓰구만 투덜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립탐정들과 비교하면, 이거 정말. 현실적이어도 너무 현실적이고 팍팍해도 너무 팍팍하잖아. 그렇게 분통을 터뜨리는 나도 이 단편집에서 어떤 단편이 가장 좋았냐고 물어보면 하무라 아키라가 쌩고생을 하는 조용한 무더위와 성야 플러스 1을 꼽게 되니 딱히 할 말은 없지만. 하무라 아키라, 화이팅. 그저 화이팅. :)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각자가 각자의 생각이나 규범이나 의리 또는 그 외의 것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리고 일단 누군가가 행동을 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파급된다. 파도는 어느 틈에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도달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리 멀리 살고 있어도 그 파도에 휩싸여 익사할 수도 있다. 바로 나처럼.

- p. 325. 성야 플러스 1

keyword
이전 15화우리가 아는 미스 마플은 여기서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