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릭에 감탄하고, 착취당한 일생에 눈물을 흘린다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시마다 소지(시공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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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여행의 끝에,
그에게 있어서 쇼와라는 상징적인 시대가 끝난 해의 봄에 하나의 살인을 범했다.



"나는 바보겠지. 언제나 돈 한 푼 되지 않는 일에 힘이나 쓰고, 뻐겨도 되는 녀석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가장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인간에게 호통을 치지. 그러나 이 성격은 고칠 수 없어. 틀렸다고 생각하면 경시총감에게라도 확실히 말해준다. 아무리 나쁜 패를 뽑아도 내 신념대로 갈 수밖에 없어. 당신에게 알아달라고는 안 해. 그러나 그냥 놔둬. 내 바람은 단 하나, 내 보잘 것 없는 인생에서 만나는 일에 대해 백은 백이고 흑은 흑이라고 말하며 죽어가고 싶어. 다만 그뿐이다. 방해하지 마."

- p. 510. 긴 여행의 끝에




. 사실 그동안 내가 생각하기엔 시마다 소지는 그렇게 대단한 작가는 아니었다. 물론 '점성술 살인사건'은 서술에 있어서든 트릭에 있어서든 S급의 데뷔작이었지만 하필이면 소년탐정 김전일을 통해 트릭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약간 김빠진채로 읽어내려갔던 게 사실이었고, '정말 하필이면' 그 다음에 집어든 책이 '마신유희'였다. 지금까지도 최악의 추리소설을 꼽으라면 무조건 세 손가락에 들어갈 소설. 종이가 아까울 수준의 트릭과 말도 안되는 범행설명, 그 와중에 겉멋든 설정. 이걸 출판사가 내줬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준 이하의 망작이라 이후 시마다 소지의 책이라면 일단 마음의 각오(어떤 의미로든)를 단단히 해야 했는데, 그런 와중에 만난 게 이 소설이었다.


. 이야기는 평이하게 시작된다. 도쿄 어디에나 있을법한 낡은 거리에서 한 늙은 노숙자가 낡은 가게의 여주인을 칼로 찔러 살해한다. 얼핏 보기엔 말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이름도 주소도 없는 노숙자가 소비세를 내지 않는다며 자신을 잡아챈 여주인을 뿌리치다 불운하게 칼에 찔렸다고 보이는 사건이라 동료들이나 상사는 그냥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이 별다른 의도 없이 한 짓이라고 판단하고 사건을 빨리 종결하려고 든다. 하지만 노인을 짧게 심문해 본 요시키 형사는 단순히 노숙자의 범행 정도로 여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건의 진실을 쫓기로 결심하고, 그 때부터 노인이 겪어온 반 세기에 걸친 비극적인 과거와 그가 만든 절묘하고 정교한 트릭이 형사의 앞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감, 수염을 깎았군."

- p. 54. 하모니카를 부는 노인




. 책의 초중반부에서 시마다 소지는 노인이 썼다는 환상적이고 짤막한 소설과 쇼와 성장기의 어두운 뒷부분을 파헤치고 다니는 요시키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쪽에서는 머리조차도 겨우 빠져나갈까말까 한 작은 창만이 존재하는 화장실에서 몇십초만에 사라져버린 피에로의 시체, 부웅거리는 기묘한 소리 속을 달리는 열차 앞을 갑자기 나타나 열차를 들어 뒤집어버린 하얀괴물의 이야기를 통해 작품 속의 수수께끼를 슬쩍 보여주고, 다른 한쪽에서는 노인이 있었던 교도소의 교도관과 동료죄수와의 대화를 대비시키며 쇼와 시대의 성장 뒷면에서 일그러진 일본의 뒷면을 보여준다. 작품 중간에서 요시키 형사가 노인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복역해야했는지 물어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에 대해 교도관은 그저 '글쎄요. 그냥 갈 곳이 없으니까 교도소에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던 게 아닌가요?' 하며 별 일 아니라는 듯 넘겨버리지만, 동료죄수였던 남자는 노인이 범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판결을 내린 재판장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는 판사가 죽기 전에는 노인을 석방시킬 수 없었다는 충격적인 실상을 털어놓는다. 그렇다고 그 교도관이 법을 어겼다거나 악질적인 인물도 아니고, 오히려 착실하고 선량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동료죄수들의 입을 빌어 이런 불합리를 토로한다.




"미야기 교도소에 있으면 쇼와 그 자체와 마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쇼와 그 자체?"

"예. 혹은 쇼와라는, 무리하게 급성장한 시대의 일그러짐이랄까, 외상이랄까, 그런 것이 거기에 꾸역꾸역 쑤셔넣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p. 151. 미야기로




. 유례 없었던 경제 대부흥기. 그 뒷편에서 사회약자들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공권력의 횡포 속에 죄를 뒤집어쓰고 인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한 시대가 지나갈 때까지 그 안에서 잊혀져버리고, 사회는 그런 그들은 희생양으로 삼아 '치안유지'와 '안정'을 얻는다. 일본추리물을 자주 읽었다면 어딘가에서 읽어봤을법한 제국은행 독살사건 등 권력과 유착되어 있거나 단서가 없는 사건들은 치안과 제도권에 대한 불신을 가져올 수 있으니 어떻게든 해결됐다고 발표하고, 뒷이야기가 남아 '진상은 따로 있다!!!!'고 두고두고 이야기되는 일은 같은 시대를 거쳐온 우리에게도 딱히 낯선 일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시마다 소지는 일본의 지나간 성장기를 후벼파지만, 일본의 역사는 그보다도 훨씬 길었고 작가의 칼날은 역사의 훨씬 깊고 아픈 부분을 향해져 있었다.



. 훗카이도에서 들어온 전화로 사건의 제2막이 오른다. 노인이 지어낸 것만 같았던 피에로 시체의 실종과 열차를 뒤흔든 하얀 괴물의 이야기는 사건의 목격자와 열차의 탈선기록을 통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굳어진다. 거기에 사건의 전후로 열차에 투신한 것으로 보이는 절단된 시체가 발견되었고, 탈선된 열차에서 그 절단되었던 시체가 일어나서 걷길래 밀가루를 던져 유령을 쫓아내려 했다는 괴이한 증언과 같은 날 밤에 다른 열차에서 벌어진 총격사건까지 더해지면서 수수께끼는 더욱 더 기묘하게 살을 붙여간다. 과연 두 대의 열차에서 일어난 다섯 개의 사건과, 어느 새 잊혀져버린 여주인 살해사건까지 이 모든 이야기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이를 풀기 위해서는 쇼와보다도 더 과거에 묻혀버린 하나의 조각이 더 필요했고, 그렇게 시마다 소지는 일본인 자신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쓰디 쓴 과거를 열어젖히기 시작한다. 역사가 제시됨으로써 사건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고,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다시 역사를 파헤쳐야 하는 구성. '본격과 사회파 미스테리의 완벽한 융합'이라는 얼핏 거창해보이는 책띠의 문구가 더없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 그렇게 1989년의 여주인 살해와 노인이 미야기 교도소에 갇힌 1964년을 훨씬 거슬러, 이야기는 1957년, 1947년을 거쳐 1943년으로 거침없이 되감아진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단순히 누명을 쓴 무식한 부랑자로만 여겨졌던 노인의 삶에는 서커스 단원, 소련 치하에서의 강제노동과 탈출, 일본의 항복, 사할린에서의 노동, 강제징용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실들이 차례차례 시간을 거슬러 모습을 드러낸다. 정신나간 부랑자의 무의미한 살인처럼 보였던 사건은, 반 세기도 더 되는 길디 긴 집념의 끝이었던 것이다.




이제 일어서야지 하면서도 요시키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 기가 막혀 멍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오랜 여행을 나메카와 이쿠오는, 아니 여태영은 해온 것일까. 기나긴 여행 끝의 살인인가. 이 끝없는 여행의 끝에, 그에게 있어서 쇼와라는 상징적인 시대가 끝난 해의 봄에 하나의 살인을 범했다.

- p. 389. 두 열차, 다섯 사건의 퍼즐




. 그렇게 한 노인을 둘러싼 역사와 수수께끼의 진실은 모두 풀린다. 먹먹해지는 마음을 안고 요시키 형사는 여태영의 앞에 직접 서서 사건을 설명하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이해한다. 너무나도 막막한 진실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짊어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짊어지고,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알 수도 없고 어떤 말로도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걸 알지만 그저 여태영의 삶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긴 글의 끝에서 요시키 형사가, 그리고 시마다 소지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랬기에 이제 거꾸로 그 공은 우리에게 넘어온다. 항상 반성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그들을 부담없이 적대해도 된다고 생각해오던 우리는, 비록 소수일지는 몰라도 진심을 이야기하는 이런 이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걸까. 또한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막막한 진실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성과를 휙 던져버리고 그저 노인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 요시키 앞에 있는 이 노인은 아득한 옛날, 일본인이 범한 죄의 응보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에 대해 일본인인 자신은 설사 경찰관이라 해도, 아니 경찰관이기 때문에 절대로 고압적인 말을 내뱉을 수 없다. 요시키는 마치 자신이 40년 저편의 일본인의 죄를 혼자 짊어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 p. 488. 긴 여행의 끝에




글의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아무런 기대감이 없었다. '본격과 사회파 미스테리가 완벽하게 융합된 불멸의 걸작!'이라는 책띠의 문구를 보면서도 그저 '점성술 살인사건과 마신유희 사이에서 적당히 평균이나 찍어주면 선방이겠지' 정도로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책을 읽고는 정말 감동했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좋은 소설이고, 작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 자신의 글을 통해 독자를 감동시키고, 생각하게 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좋은 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글을 읽는 것은 항상 즐겁고, 또 기대되는 일인가보다.




요시키는 유치장을 나가 담당자에게 잠금장치를 걸게 하고 의자를 3층 복도 구석에 돌려놓았다. 그리고 철창 너머로 여태영을 바라보았다. 여태영은 얼굴을 들지 않은 채 가만히 바닥을 보고 있었다. 요시키는 그가 얼굴을 들기를 잠시 기다렸지만 그럴 것 같지 않아서 이렇게 말했다. "지독한 꼴을 당하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유치장 앞에서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노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보이지는 않았다. 얼굴을 들고 요시키는 다시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4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이번 사건이 자신에게 대체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여태영의 기발한 발상이 하늘을 움직였다. 아까 무심코 자신이 그렇게 말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하늘이 자신에게 뭔가를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p. 507. 긴 여행의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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