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하지만 힌크,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
"살인 예고. 10월 29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리틀 패덕스에서 살인이 일어날 예정. 여러분, 이 예고를 꼭 믿으시오."
- p. 20.
. 가장 '미스 마플다운' 소설이다. 처음 마플 양을 접하는 사람에게 맛보기로 추천할 수 있는 소설이 '화요일 클럽의 살인'이고 마플 양이 등장하는 최고의 걸작이 - 개인적으로는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는다 - '복수의 여신'이라면, 이 '예고살인'은 미스 마플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과 엇비슷할 정도의 시골인 치핑 클레그혼. 동네 사람들이라면 모두 필수적으로 구독하는 마을신문인 '가제트'지에 뜬금없이 "리틀 패덕스 저택에서 살인이 일어날 예정"이라는 예고가 실리고, 동네 사람들은 추리게임 비슷한 이벤트를 기대하며 너나없이 리틀 패덕스 저택으로 모여든다. 맛있게 차려진 음식과 조금은 민망해하면서도 기대감에 찬 화기애애한 인사. 그렇게 여느 시골마을의 모임과 별반 다를 것 없던 분위기는 모두가 기대하고 있던 암흑 속의 '살인 게임'에서 총성이 울리며 깨어진다. 그리고 불이 켜진 자리에서 발견된 낯선 남자의 시체와 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리틀 패덕스의 여주인. 이제, 마플 양이 등장할 차례다.
. 마플 양이 살고 있는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의 이야기는 아니고 그 옆동네 정도쯤 되는 치핑 클레그혼에서 벌어진 사건이다보니 그 전의 '서재의 시체', '움직이는 손가락'과 함께 묶어 "옆동네 3부작" 정도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뒤로 이어지는 '주머니 속의 죽음', '마술살인', '패딩턴 발 4시 50분'은 "국내여행 3부작"쯤 될 테고. :) 아무튼 이 작품에는 미스 마플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빠지지 않고 나와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옛날 이야기, 그 나이대 할머님들 특유의 무시무시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가동되는 어마어마한 정보망, 그리고 개별 사건에 함몰되지 않고 인간 그 자체를 통찰하면서 사건을 풀어나가는 모습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마플 양은 사실상 이 작품에서 완성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우리처럼 나이 많은 여자들은 항상 기웃거리고 다닌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하고 주의해야 할 일이에요. 세계 곳곳에 사는 친구들에 대해서 묻고, 또 그들이 이러이러한 것들을 기억하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또 기웃거리고요. 누구의 딸이 누구와 결혼했는가 하는 것 등 말이에요. 이 모든 게 도움을 주지요, 안 그래요?"
- p. 129.
. 거기에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시골마을의 모습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는 것도 이 소설이 가진 매력이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가제트 지에 실린 기사들은 전쟁이 막 끝난 50년대 영국 지방의 생활상에 대한 자료로 써도 될 정도고, 중간중간 마을 사람들이 밭에서 채소를 키우고 벌꿀을 교환하는 소소한 장면들을 읽고 있자면 시골 특유의 푹 익은 내음이 느껴질 정도다. 그전까지의 크리스티 여사의 소설 대부분은 번화한 도시, 아니면 시골이라도 잘 다듬어진 전원을 배경으로 했는데, 이 작품의 시골은 정말 사람들이 땀흘리며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생명력 넘치는 공간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 배경 뿐만 아니라 필리파나 힌클리프로 대표되는 이 소설 속의 건강하고 흙내나는 인물들은 참 이색적이다. 조용하고 사려깊던 '오드리'(0시를 향하여)나 발랄하고 재치있는 '터펜스'(부부탐정) 같은 그전까지의 인물들과는 또 다른, 솔직하고 거침없고, 무뚝뚝하게 보일 정도로 꾸밈없는 당당한 모습까지. 뭔가 1950년이라기보다는 요즘 나오는 이야기들에 자주 보이는 인물형이 아닌가 싶어 한 순간 크리스티 여사가 시대를 뛰어넘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실제로 이 이후의 소설에서는 이런 인물 유형이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건강하고 올곧은 인물들과, 불행에 빠져 젊은 시절을 흘려보내고 뒤늦게 찾아온 헛된 꿈에 부풀어 스스로의 삶을 무너뜨린 범인의 대조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이렇듯 여러 방향에서 생각해볼만한 것들이 많은 좋은 소설이었다. 추리에 있어서도 작가 혼자 앞서나가는 게 아니라 범인이든 트릭이든 진상을 파악할만한 단서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으니 꼼꼼히 읽으며 따라가볼만하다. 다만 해문판이 워낙 오래된 책이다보니 당연히 오타라고 생각했던 게 결정적인 힌트였을 줄은(....) 원서로 읽었다면 조금 더 명확한 힌트가 되었을까? 아니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흘러넘겼으려나. :)
"모두 잘못된 거란다. 영원의 사랑. 평범한 금요일. J - 내가 보기엔 그들이 사랑 싸움을 한 것 같은데 - 혹시 이것이 도둑들의 암호라고 생각하지 않니? 닥스훈트 종이 또 나왔구나! 닥스훈트가 뭐가 좋다고 이러는거지. 네 아저씨 시몬은 맨체스터 테리어 종을 키웠었지. 정말 우아하면서도 귀여운 개였단다. 나는 다리가 긴 개가 좋아.... 해군 투피스를 사러 해외로 가는 여인.... 치수도 정찰가도 없음. 결혼식을 알리다 - 아니, 살인.... 뭐? 세상에, 이럴 수가! 에드먼드, 이걸 들어 보렴. 10월 29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리틀 패덕스에서 살인이 일어날 예정. 여러분, 이 예고를 믿으시오 - 이런 괴상한 일이 다 있담!"
- p. 8.